먼 기억 속의 정월대보름은 늦게까지 놀기 좋은 날이었다. 다른 날 같으면 벌써 이불 속일 텐데 이날만큼은 늦게까지 나가 놀아도 됐다.
마을 초입의 논두렁에 아이들의 그림자가 속속 모여든다. 한 손에는 빈 철제 깡통, 다른 한 손에는 잘 마른 나뭇가지들이 들려 있다. 불을 피워 불꽃이 옮겨 붙은 나뭇가지들을 조심스레 깡통에 넣고 철사로 이은 손잡이를 잡아 휘휘 저으면, 빨간 불이 활활 타올라 하늘에 떠 있는 달보다도 더 크고 밝게 빛난다. 몇 바퀴를 돌리다 하늘을 향해 손을 놓아 버리면 빨간 빛덩어리는 포물선을 그리며 높이 솟구쳤다가 땅으로 떨어져 내려와 반딧불이처럼 흩어진다. 꺼져가는 숯불을 다시 깡통에 넣고 휘휘 돌리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맹렬히 타오른다. ‘불장난하면 밤에 자다가 오줌 싼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은 들리지도 않는다. 지금 던지는 내 깡통이 누구보다 높이 올라가기를, 누구보다 밝게 반짝거리기를 바랄 뿐이다.
때마다 계절마다 지내는 풍습이 있다. 당연히 다양한 먹을거리와 재미있는 놀이가 동반된다. 설부터 시작해서 정월대보름이 있고 봄이 되면 삼짇날, 여름엔 단오를 지나 칠월칠석, 풍성한 가을엔 한가위가 기다려진다. 날이 추워지면 동글동글 새알심을 넣고 끓인 팥죽을 먹는 동지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초콜릿이나 사탕을 주며 마음을 표현한다든가, 긴 막대과자를 주는 날은 익숙하지 않다. 아무리 시대의 흐름이라지만, 새로운 것만 즐기고 오래된 것은 잊히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잘 준비를 하던 나를, 여섯 살배기 큰아들이 “아빠~” 하고 나지막이 불렀다. “어, 아들 왜? 아빠가 책 읽어 줄까?” 하고 대답을 하는 순간, 아들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한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내 더위 사 가라고.” 여러모로 올여름은 유난히 더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