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는 자본시장에서는 ‘갑’(甲)으로 통한다. 국내외 다수의 증권ㆍ운용사들이 국민연금으로부터 자금을 위탁받기 위해 목을 매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조 때문에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투명성과 청렴성을 보장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야 하지만 아직까지는 미흡하다는 것이 업계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특히 지난해 말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고위직인 실장급 인사가 내부 정보를 유출한 것은 업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당시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한 것과 관련 검찰 수사를 받던 중이었다.
외부로 자료를 유출한 A 전 실장의 경우 2015년 7월 10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찬성을 결정한 국민연금 투자위원회에도 참석했던 인물이다. 이처럼 내외부의 시선이 쏠리는 상황에서 이직을 준비하는 한편 내부 자료를 외장하드에 차곡차곡 모은 것은 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A 전 실장의 이직이 예정돼 있던 N증권사도 이번 국민연금 정보 유출 사태의 한복판에 서 있다. 이 증권사는 투자은행(IB) 업무 강화를 위해 사모투자(PE) 사업 등을 강화 중이었다. A 전 실장은 국민연금에서 대체투자 전문가로 통했다. 부동산 투자뿐 아니라 PE 사업도 대체투자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이번 사안은 ‘을’(乙)의 위치에 있는 기관이 갑의 정보를 얻기 위해 조직적으로 행동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증권사와 국민연금의 ‘검은 공생’인 셈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기밀 자료 유출 사례가 반복되는 것도 심각한 사안으로 업계는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 2013년에도 국민연금 운용역이 자산운용사에 투자 계획서를 전달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내부 통제를 강화한다고 자신했지만 국민연금은 복수 직원의 조직적인 기밀 유출을 막지 못했다.
이 같은 배경은 국민연금이 단순히 자본시장에서 ‘징검다리’ 정도로 여겨지는 원인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자본시장 운용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에 계약직으로 입사한다. 이후 이곳에서 경력을 쌓은 뒤 더 좋은 기관으로 이직하는 사례가 많다. 이는 자본시장의 선순환 구조로도 볼 수 있다.
다만 국민연금 경력이 단순히 ‘갑의 기관에 근무한 적이 있다’는 정도로 업계에 인식되는 것은 정보 보안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배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국민연금의 한 관계자는 “퇴직이 예정돼 있다면, 보다 많은 정보를 들고 가는 것이 다른 기관에서 오래 근무할 수 있는 배경이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