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는 개성 출신 기녀로 이름은 ‘진’ 또는 ‘진이’이며, 기생 이름은 ‘명월’이다. 중종(재위 1506~1544) 연간 사람으로 개성에 살던 소경의 딸 또는 황(黃) 진사의 서녀로 알려져 있다. 기생이 된 배경도 자세하지 않다. 옆집에 살던 한 서생이 그녀를 몹시 짝사랑하다 죽자 스스로 기생이 되었다고 전할 뿐이다.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자처한 황진이는 노래와 거문고, 시(詩)에 뛰어났다. 방탕하고 사치한 것을 싫어한 그녀는 화장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가는데도 좌중을 압도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성품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아 남자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를 잘했다”고 평했다.
이런 황진이의 면모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황진이가 전국을 유람할 때에 전라도 나주를 지나게 되었다. 마침 고을 수령이 관찰사를 초대해 큰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당시 다 해진 옷에 때 묻은 얼굴을 한 황진이는 스스럼없이 바로 좌석에 끼어 앉아 태연스레 이[?]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연주하니 여러 기생들이 다 기가 죽었다고 한다.
황진이는 당대 명기답게 여러 남성과 숱한 이야기를 남겨 놓았다. 그중 하나가 선전관 이사종과 맺은 인연이다. 이사종은 노래를 잘했다. 이사종이 왕명을 받들고 개성으로 가는 길에 냇가에서 잠시 쉬면서 노래 서너 가락을 불렀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황진이가 노래를 듣게 되었다. 황진이는 “이 노래 가락이 특이하니 시골구석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내 듣자니 서울에 풍류객 이사종이 절창이라 하는데 필시 이 사람일 것이다” 하고는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하니 과연 맞았다.
황진이는 이사종을 집으로 초대해 며칠 머물게 한 후 6년을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이튿날 황진이는 3년간 먹고 지낼 재물을 이사종 집으로 옮겼다. 3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이사종이 황진이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마침내 약속한 6년이 되자 황진이는 이미 약조한 기일이 다 되었다고 말한 후 그대로 떠나버렸다. 여성이 주도한 현대판 계약결혼이었던 셈이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밤낮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이 가고 아니 오누나!
황진이가 지은 이 시를 읊다 보면 인생사를 꿰뚫어보는 한 인간을 만나게 된다. 이 시구처럼 황진이는 세월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도 달게 받아들였다. 40세 미만에 요절했다고 하는데 죽음을 앞두고 “곡하지 말고 상여가 나갈 때에는 북이나 음악으로 인도해 달라”는 파격적인 유언을 남겼다.
참으로 사람은 가고 없으나 그 자유정신은 역사의 물결을 타고 도도히 흘러 우리 곁으로 왔다. 삶과 죽음 모두 기꺼이 받아들인 그녀의 자유의지가 현재 각박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