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의 주인공처럼 알려지기도 한 박차정(1910~1944)! 그는 1910년 5월 8일 경남 동래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의 무단정치에 비분강개하여 1918년 1월 자결했다. 어머니는 화북조선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과 사촌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오빠들도 모두 항일 투쟁에 참여한 이 집안은 1918년에 설립된 동래 성결교회의 교인이기도 하였다.
박차정은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일신여학교에 다니던 중 역시 항일운동가인 숙부 박일형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과 근우회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29년 3월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서울 시내 각 여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지도하였으며, 1930년 1월엔 부산방직 파업사건을 주도하다가 동래에서 체포됐다. 당시 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30년 2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한 그는 이듬해 3월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 내조는 물론 단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2년 의열단이 한중연합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장제스(蔣介石)의 도움을 받아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사관생도 양성을 담당하였다. 1935년 6월에는 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으로, 이듬해 7월에는 이청천의 처 이성실 등과 함께 남경조선부인회를 조직하고, 그 지역 조선 여성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37년 11월 의열단이 한중민족연합전선의 일환으로 전개한 대일본 라디오방송을 통한 선전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1938년 봄에는 임철애라는 이름으로 기관지 ‘조선민족전선’에 ‘조선부녀와 부녀운동’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여성들도 총체적 항일 투쟁에 나서기를 촉구하였다. 즉 당시 조선 여성의 법률적 구속, 정치적 압박,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지위 등의 현실을 분석해 중국과 함께 전면적으로 시작된 항일 투쟁에 여성들도 일치단결, 참여해 조국의 자유를 회복하자고 역설하였다.
1938년 10월에 창설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으로 선임되어 무장투쟁에도 앞장섰다. 결국 1939년 2월 장쑤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하던 중 부상해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5월 충칭에서 순국하였다. 광복 후 그의 유해는 남편 김원봉이 자신의 고향인 경남 밀양 감천동 뒷산에 묻히게 하였다. 34세의 짧은 생이지만 조국의 해방을 위해 다 바친 그의 묘소는 돌보는 이 없이 거의 방치된 상태이며, 헌신적인 항일 투쟁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나마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