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들의 지원을 배제하는 그런 명단은 있었던 것으로 판단이 되고 있습니다.” 비판과 비난이 쏟아졌다. 조윤선 문화체육부 장관이다. 9일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국민의 당 이용주 의원이 18번 반복한 “블랙리스트가 존재합니까?”라는 질문의 답이다.
같은 날 미국과 한국에서 펼쳐진 눈길을 끈 두 모습이다. 메릴 스트립은 이민자,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해 차별적 태도를 보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향해 직격탄을 날리며 다양성과 공존의 가치를 강조했다.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의혹을 받는 조윤선 장관이 모르쇠로 일관하다 처음으로 블랙리스트 실체를 인정했다.
세계적 영화제 브랜드로 자리 잡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영화인과 관객마저 외면하는 최악의 영화제로 추락했다. 권위 있는 맨부커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작품 ‘소년이 온다’는 평단의 좋은 평가에도 세종도서(옛 문화부 우수도서) 심사에서 배제됐다. 연극 ‘개구리’ ‘청춘예찬’ 등을 연출하며 한국 연극계를 이끄는 중견 연출가 박근형의 작품은 자격이 충분함에도 예술 지원을 받지 못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해 1000만 관객이 본 영화 ‘변호인’에 투자했다는 이유로 CJ그룹 이미경 부회장은 강제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블랙리스트 의혹에 연루된 문화체육부 김종덕 전 장관과 정관주 전 차관이 구속됐다. 조윤선 장관도 피의자 신분으로 특검조사를 받았고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문화 융성을 국정 기조로 내세운 박근혜 정부에서 행해진 일들이다.
시인 고은부터 배우 송강호까지 수많은 문화예술인과 단체가 세월호특별법 제정 촉구 선언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뤘다는 이유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야당 대선주자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각종 지원 사업에서 배제되고 차별받았다. 사상과 지향점이 다른 이들을 탄압하는 데 지위와 권력을 악용한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다.
블랙리스트는 민주주의를 훼손한 반헌법적 범죄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과 세금을 악용해 예술가의 양심과 신념을 무너뜨려 정권에 순치시키는 반예술적 행위다.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반대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반인권적 독재다. 불안과 공포를 활용해 창작자에게 검열을 내재화시켜 문화를 죽이는 반문화적 작태다. 꿈과 희망이 있고 인간답게 살아가는 사회를 붕괴시키는 반사회적 행태다.
예술인의 성향과 사상을 검증하고 편을 가른 박근혜 정부에 대해 고은 시인은 “구역질 나는 정부”라고 질타했다. ‘2016 S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배우 한석규는 “다르다는 것을 불편함으로 받아들이면 그 불편함은 우리의 배려로 포용하고 어울릴 수 있지만, 그것을 위험하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분명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고 같이 어우러진 좋은 한 개인, 한 사회, 한 국가가 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라고 비판했다.
블랙리스트 실체를 인정한 조윤선 장관과 수많은 문화예술인을 탄압한 박근혜 대통령이 입만 열면 말하는 문화와 국가를 위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너무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