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에게 김경천(金擎天, 1888.6.5~1942.1.2)은 낯설다. 하지만 1920년대만 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활동하던 만주와 러시아는 물론, 국내 한인 동포들에게도 꽤 알려진 무장 항일투쟁의 1인자였다. 그는 기마술 등 선진 전략·전술로 어떤 독립운동가보다 효과적으로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것을 일본 육사에서 배웠다.
유명한 무관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나폴레옹을 흠모하며 군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키웠다. 일본 육사에 들어간 것도 군인으로서 더 높은 이상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그는 도쿄 기병 제1연대 중위로 복무한다. 군인으로서 그의 앞길은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조국이 일본에 합병된 현실은 늘 지울 수 없는 아픔이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투쟁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그해 6월 육사 3년 후배 지청천과 일본군에서 탈출해 만주로 망명한다.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을 잠시 한 뒤, 소련 연해주로 건너가 1000여 명에 달하는 항일의병 독립군을 조직한다. 이후 일본군과 중국 마적, 러시아 백군과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백마를 타고 만주와 시베리아 벌판을 누비는 그를 보고 조선인 동포들은 ‘백마 탄 김 장군’이라고 했다
1923년 김경천은 깊은 시름에 빠진다.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러시아 정부가 무장해제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독립운동을 모색했지만 여의치 않자 극동사범대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러던 중 1930년대 스탈린 정권에 의한 강제 이주 때 가족을 찾아 카자흐스탄으로 갔다가 간첩죄로 체포돼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노역에 시달리다 1942년 숨졌다. 1998년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