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을 조직해 활동하다 공산주의와 결별한 후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로 거듭난 김준연(金俊淵, 1895. 3.14∼1971. 12.31). 그는 개화의 선각자, 항일투사, 국내 최초의 세계 법학자, 조선의 마지막 선비 등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한학을 공부한 김준연은 영암보통학교에 입학한 13세 때에 같은 마을에 살던 네 살 연상의 김옥성과 결혼해 60년간 축첩하지 않고 해로했다. 일본 유학 중 조선기독교청년회의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던 그는 1919년 도쿄 2·8독립선언에 주동적으로 참가했으며 신인회(新仁會)를 중심으로 여운형(1886. 5. 25~1947. 7.19) 환영회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을 선전하기도 했다.
일본, 독일, 영국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근무하다가 귀국해 신간회에 참여했고 조선공산당을 재조직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 제3차 조선공산당(ML) 책임비서가 됐다가 7년간 옥고를 치른 후 풀려나면서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결심했다.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에도 관련돼 총독부에서 고문을 당한 그는 신문사 취업 금지령까지 받았다. 그는 송진우 사장(1890. 5.8~ 1945. 12.30)과 함께 사임한 뒤, 광복 때까지 경기도 전곡에서 해동농장을 관리했다.
광복 후 송진우와 ‘국민대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한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공산당에 대해 맹렬히 공격을 가하고 한국민주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민주당에서 제명되자 통일당을 결성했으며 1967년엔 민중당 총재로 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는 내각책임제 헌법을 대통령 중심제로 바꿔 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12년 전남 영암에 개관한 김준연기념관은 올바른 역사의식과 안보의식의 장으로 나라 사랑을 일깨우는 살아 있는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