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항해하던 세월호가 느닷없이 침몰해 사망 295명, 실종 9명 등 304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어린 학생들을 살릴 수 있었던 7시간, 행적이 불투명한 박근혜 대통령으로 인해 골든타임을 놓친 대한민국.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에 발발한 한국전쟁 때도 그랬다. 이승만 대통령(1875.3.26~1965.7.19)에게는 6시간 만인 오전 10시에 보고됐다. 부임한 지 보름밖에 안 된 신임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1924.9.9~1996.12.27)이 그 시간에 육군본부 작전상황실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사 간 지 얼마 안 된 그의 집에 전화가 연결되지 않아 연락할 길이 없자 헌병이 사이렌을 울리며 그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전쟁이 터진 줄도 모르고 집에서 쉬고 있던 그는 뒤늦게 헌병차를 타고 상황실로 갔다.
이날 새벽 소집된 육본 참모회의는 오후 2시가 돼서야 가까스로 열려 대비책을 논의했으니 북한군의 공격이 개시된 지 10시간이 지난 후였다. 군 수뇌부의 부실한 대응이 비극을 더 키운 것이다.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장창국은 군 장교가 되려고 194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하던 해인 1945년 광복되자 귀국해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고 그 다음 해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정치와 사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모병과 훈련을 실시해 1947년 초 대대 편성을 끝내고 연대를 편성하던 중 총사령부 작전교육국장에 발탁됐다. 미 군사학교 첫 유학생으로 교육을 받은 뒤 육군 참모학교의 교감 겸 부교장으로도 일했다.
41세에 합참의장에 오른 그는 교육 및 작전보직을 두루 맡아 지장(智將), 덕장(德將)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1967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뒤 수자원개발공사 사장, 주 브라질 대사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