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시녀’로 비판받아온 검찰이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최순실 국정농단의 공범’으로 규정하는 등 고강도 수사를 벌였지만 미완의 수사에 그쳤다. 이웃 나라인 일본 검찰도 권력형 비리에 제대로 맞서지 못해 신화가 퇴색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지만 ‘권력의 저승사자’로 불릴 때가 있었다.
그 결정적 계기는 1976년 일본 최대의 게이트인 ‘록히드 사건’ 의혹의 중심에 있던 정계 최고 거물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1918.5.4~1993.12.16) 전 총리의 구속이다. 총리 퇴임 후에도 ‘그림자 쇼군’으로 불릴 정도로 자민당 최대 파벌을 거느리며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때였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총리까지 오른 다나카는 ‘이마다이코(今太閤)’로 불렸다. ‘이마다이코’는 비천한 태생을 딛고 최고 신분인 ‘다이코’까지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입신출세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그는 행정 공무원을 능가하는 방대한 지식과 실행력으로 ‘컴퓨터 달린 불도저’라는 별칭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 이후 16번 연속 중의원에 당선된 다나카는 1972년 54세 최연소 총리로 취임, 중·일 국교 정상화를 실현하고 열도 개조를 추진하는 등 나름대로 업적을 쌓았으나 2년 반 만에 그의 금권정치 실상을 파헤친 기사로 인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다나카 금맥사건’, ‘록히드 사건’ 등 비리와 뇌물수수 등으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자민당의 오히라, 스즈키, 나카소네 등 내리 세 차례 정권을 탄생시켰다. 게임회사인 세가는 록히드 사건을 풍자한 비디오 게임 ‘아임 쏘리’를 만들기도 했다.
상고심이 열리던 1993년 12월 16일 다나카가 갑상선 기능 저하에 폐렴이 겹쳐 숨지면서 공소 기각으로 재판은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