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농산물의 시장개방과 농업보조금의 대폭 감축을 의무화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한 지 2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한국농정은 ‘쌀의 늪’에 빠져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쌀산업 경쟁력 강화에 필요한 시간을 번다는 명분으로 두 차례의 관세화 유예를 거듭하면서 국내생산량의 10%에 육박하는 의무수입물량(MMA) 부담을 짊어지게 됐다.
또 급속한 식생활 변화로 1인당 쌀 소비량은 거의 반토막이 났다. 정부는 해마다 낡은 방식의 쌀수급 및 가격안정대책을 거듭하고 있지만 과잉재고 및 쌀재정소요 규모는 감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완전히 교착상태에 빠진 쌀정책의 맹점은 무엇일까? 하나는 물량수급조절시책에 대한 잘못된 집착이며, 또 하나는 과도한 쌀편중지원시책이다.
먼저 자유시장경제 아래서 70만 호의 생산농가에 전국민이 소비하는 쌀수급과 가격문제를 정부개입을 통해 해결한다는 과욕을 버려야 한다. 수급 및 가격결정은 시장에 맡기고 정부는 지나친 시장변동과 불안정에 대비하는 보완책에 충실한 방식으로의 정책전환이 선결돼야 한다.
다음으로는 직불재정의 큰 비중을 쌀고정직불에 할애하고 WTO가 허용하는 허용보조총액(AMS) 전액을 변동직불에 투입하는 지나친 쌀편중지원을 바꿔야 한다. 쌀과 타 작물 간에 현저한 수익격차가 존속되는 한 쌀과잉과 타작물의 부족으로 인한 국민식량의 대외의존 심화, 방대한 자원낭비를 벗어날 길이 없다.
우리 농정이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가격보장’의 망령 탓이다. 쌀값 지지가 농가소득 증진의 필수조건이라는 잘못된 믿음 안에서, 생산자와 정치권 등 중요 이해당사자들이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정작 농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쌀값이 아니라 소득확보와 경영안정이다. 이 목표는 가격지지가 아니라 유럽연합(EU) 등 선진국 농정에서 보듯이 WTO가 허용하는 농가경영안정 정책수단을 통해서 훌륭하게 달성될 수 있다.
이젠 품목단위 대책을 넘어 경영체대상 정책으로 가야 한다. 농지의 절반을 차지하는 임차경영에 지급되는 직불금의 큰 부분은 지주에게 전가되기 마련이다. 판매 여력이 없는 영세 쌀농가에 있어서는 가격보장보다 경영비 안정이 훨씬 큰 의미를 갖는 현실을 직시하고 쌀대책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지 않는 한 우리 농정은 제자리걸음을 벗어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