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1927.10.24~2011.12.13)은 강직했다. 그가 세우고 일군 포항제철의 강철처럼 말이다. 그가 군 생활을 할 때 다들 군수물자를 빼돌려 집에 군용 모포 하나쯤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군수물자를 빼돌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포항제철 회장 때도 그랬단다. 포철 건설 당시 수많은 청탁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 측근들에게 밉보여 중앙정보부에서 허구한 날 박태준의 집을 수색해 꼬투리를 잡으려 했을까. 그래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박 대통령이었다. 둘은 육사에서 맺은 사제지간의 인연을 바탕으로 강력한 신뢰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5·16 군사 쿠데타 후 그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비서실장에 임명된다. 박 의장은 전국 순회 때 늘 그를 동행시켰다고 한다. 1963년 소장으로 예편한 그는 경영인으로 변신해 그 능력을 인정받는다. 만성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중석을 1년 만에 흑자로 돌려세우고, 1967년 4월 포항제철 사장이 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박태준 신화를 창조한다.
하지만 그는 정치에 입문하면서 시련을 겪는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 밑에서 최고위원이 됐으나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각제 공약을 주장하다 YS와 갈등을 빚고 탈당한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포철 때 30억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한동안 해외를 떠돌아다녔다. 이후 정치적으로 재기하며 김대중 정권에서 국무총리에 취임하지만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한다.
그의 삶이 말년에 개인 비리로 얼룩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허허벌판에 말뚝을 박아 포철을 세계적 철강회사로 만든 그의 철강 신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