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내 딸이 백수라고?

입력 2016-09-2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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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마지막 날 동네에서 작은 모임이 있었다. 큰아이 친구 엄마들의 모임인, 일명 ‘(아)줌마회’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만들어졌으니 올해로 13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번 모임의 목적은 추석 연휴 시댁·친정에서 쌓인 스트레스 풀기! 나이가 가장 많아 ‘왕언니’로 불리는 명석 엄마가 속내를 쏟아냈다. 예상과 달리 부엌일로 인한 스트레스는 없었다. 그런데 그보다 몇 십 배 더 가슴을 답답하게 한 일이 있었단다. 이야기는 이렇다.

숙명의 한 판은 아이 문제로 불거졌다. 손위 동서가 대학원에 다니는 큰아이에게 “너 취업 못하니까 계속 학교에 다니는 거지? 다 알아. 백수니까 큰엄마가 용돈 준다 줘!”라며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넸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사이인데 하며 마음을 다잡는 순간 또 한 방이 날아왔다. “내일모레 서른인데 용돈이나 받고 쯧쯧… 얼른 시집이나 가라!” 몇 년 전 이혼한 시동생의 말엔 황당해 헛웃음이 났다. 영화배우 이영애의 유행어 “너나 잘하세요!”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대학원생=백수’라니? 그들은 백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백수(白手)는 백수건달(白手乾達)의 준말로, ‘돈 한 푼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사람’이다. 조선시대 양반 자제들 가운데 과거를 보지 않거나, 낙방한 뒤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무위도식하는 이들의 ‘빈둥거림’을 비하한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음에도 마땅한 직업이 없는 사람으로 의미가 변했다. 한때 화백(화려한 백수), 가백(가정에 충실한 백수), 불백(불러줘야 나가는 백수), 마포불백(마누라도 포기한 불쌍한 백수) 등 백수의 급을 나눈 우스개가 유행하기도 했다.

백수의 한자를 白手가 아닌 白壽로 잘못 아는 사람들도 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손이 하얗다’ 정도로 기억한다면 헷갈릴 일은 없겠다. 白壽는 나이를 뜻하는 말로, 백(百)에서 일(一)을 뺀 99세를 가리킨다.

“돈 없으면 건달, 돈 있으면 한량”이라는 북한 속담이 있다. 우리 사전상의 의미도 ‘건달’은 돈이 없어 처량한 신세인 반면, ‘한량’은 돈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말들의 유래가 매우 흥미롭다. 건달은 인도에서 나온 불교 용어로, 음악을 담당하던 신(神)이다. ‘건달바(乾達婆)’, ‘건달박(乾達縛)’이라고 했다. 이들은 술과 고기는 입에 대지 않고 향만을 먹고 살았다. 이후 신이 아닌 인간 건달바가 생겼는데,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음악만 연주해, 지금의 건달이라는 뜻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한량(閑良)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조용하고 어진 남자’다. 조선시대에 무과에 붙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들 중에는 무관이 되겠다며 무술 연습이나 하며 아무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모습에서 다소 부정적인 ‘돈 잘 쓰는 바람둥이’라는 뜻이 생겨났다. 오죽하면 “한량은 죽어도 기생집 울타리 밑에서 죽는다”는 속담이 있을까.

친척 간에는 지나친 관심보단 배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결혼해야지”, “좋은 데 취업해야지” 등의 덕담이 상황에 따라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될 수도 있다. 듣는 사람의 기분이 좋아야 덕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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