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양심적으로 민중을 지도하고 또한 민중의 의지를 대표하여 항거할 점은 어디까지나 항론도 사양치 않았으며, 평범한 정치로 민중에 임하고 공정렴근(公正廉謹)을 관계일생(官界一生)의 목표로 삼은 것은 천인(天人)이 공인(共認)하는 바이다.” -반민특위 자수 편지 중에서-
한규복(韓圭復·1875.7.7~1967.9.13)은 일제강점기의 신념형 친일 관료다. 그는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전문학교와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서 수학하다 귀국해 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기도 한 그는 와세다대 재학 중 유도를 배웠고, 조선의 유도 단체를 지원하는 한편 태껸 전수자 및 유파를 찾아 지원해줄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경술국치 후에는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감사관으로 활동했다. 진주군수를 시작으로 동래군수, 충남 및 경북 참여관을 지냈으며 충북도지사와 황해도지사를 거쳐 중추원 참의를 수차례 중임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기업인으로 관변단체에서 계속 활동했다. 특히 태평양전쟁 중에는 조선임전보국단, 국민동원총진회 등 전쟁 지원 단체에 적극 가담했다. 이 공로로 수차례 훈장을 받은 그는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도 수록됐다.
광복 직후 미 군정청 고문직도 사양하고 누룩을 생산하는 한국곡자(?子)주식회사를 설립, 사장이 됐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곡자 운영과 종친회 일을 하고, 1960년 주간종합잡지 ‘주간대중(週刊大衆)’의 동인이자 필진으로 참여했다.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4회나 수상했다. 민족정경문화연구소는 1948년 발간한 ‘친일파 군상’에서 “일층 진충보국(盡忠報國)하면 자기 개인은 물론, 민족적으로도 장래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한 자”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