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륜이 쌓인다고 지혜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 절로 지혜가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달리 몽테뉴는 그런 믿음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갈고 닦지 않으면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가 노년이다. “나는 어리석고 비생산적인 자존심과 진력나는 잔소리, 까다롭고 비사교적인 성격, 미신, 그리고 쓸모없는 부(富)에 대한 꼴같잖은 취향 같은 것 말고도, 나는 노년에서 더 많은 시기심과 부당함과 심술궂음을 발견한다.” 저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노년이 되면 얼굴보다 정신에 더 많은 주름살이 생긴다. 늙으면서 시큼해지고 곰팡내 나지 않는 영혼이란 없으며, 있다 해도 매우 드물다”라는 주장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장수사회로 달려가는 우리 사회가, 스스로 노인의 반열에 들어선 사람들이 깊이 새겨야 할 경고이다.
“소년은 앞을 보고 노인은 뒤로 본다.”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겠지만 노년이 가져오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호라티우스처럼 “그대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무덤 생각을 하지 않고, 대리석을 깎아 집을 짓고 있다”라고 노래하는 사람도 있다. 몽테뉴는 보통 사람과 비슷하게 노년을 경험하고 있다. “내가 노년에서 발견한 위안은 노년이 내 마음 속에서 세상 형편에 대한 걱정, 재산, 지위, 학문, 건강에 관한 걱정, 나 자신에 관한 걱정 등 인생을 심란하게 만드는 여러 욕망과 번뇌를 느슨하게 했다는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이듯 그 시대에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갈등이 심했다. 갖고 있는 것을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을 두고 벌어지는 부자 간의 갈등이다. “늙어 꼬부라져서 반쯤 죽어가는 아버지가 집 한 쪽 구석에서 재산을 혼자 움켜쥐고 자식들의 발전과 생계에 지장을 주는 일은 옳지 않다.” 그 시대에도 살아가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몫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삶 자체가 본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노년은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할 때임을 강조한다. “지금껏 남을 위해 살아왔으니, 적어도 남은 생애 동안에는 자기를 위해 살아보자. 우리를 옭아매는 강력한 의무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는 이것저것 즐겨봐야 한다.”
노년이 되더라도 젊은 날과 마찬가지로 의식이 무엇인가를 조준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방황과 짜증과 스트레스가 엄습하게 된다. “우리가 정신을 조이거나 다잡지 않으면 우리의 정신은 상상력의 공허한 들판을 이리저리 헤매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위는 항상 방황하는 정신을 낳는다”는 로마 시인 루카누스의 말은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의 맹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노년이 되더라도 툴툴거림이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은 벗어날 길이 없다. “사물에 부여한 성질을 우리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행복과 불행은 오직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죽음에 대한 몽테뉴의 주장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미리 미리 걱정하고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단 한 번만’ 일어나는 일에 대해 그리 슬퍼할 필요가 있는지, 짧은 순간에 끝날 일을 그토록 오랫동안 두려워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피서용 책으로 제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