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클린턴의 연설 장면에는 거의 모든 미국민의 시선이 고정돼 있었을 거다. 연설 내용만큼이나 눈길을 끈 게 순백의 바지 정장으로 무대에 오른 클린턴의 의상이었다. 한 언론매체는 역사적인 감동을 선사하면서 순백을 택한 클린턴의 센스에 미국 패션계가 일제히 ‘좋아요’를 클릭했다며 그날의 의상에 후한 점수를 줬다.
클린턴의 의상 디자이너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여성 패션지 ‘보그(VOGUE)’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가 코치해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존 모델인 윈투어는 클린턴의 열렬한 지지자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이다. 윈투어는 샤넬의 트위드 정장이나 마르니의 프린트 드레스를 즐겨 입는다. 그러던 그녀가 올해 뉴욕 패션 위크에서 유니폼을 바꿔 입어 한때 호사가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녀의 새 유니폼은 다름 아닌 힐러리 클린턴 티셔츠였다. 그 티셔츠는 클린턴 선거 캠프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 팔고 있는데, 마크 제이콥스, 토리 버치, 디자이너 듀오인 다오이 초와 맥스웰 오스본 등 내로라하는 패션 거물들이 디자인했다.
명품 마니아인 윈투어가 겨우 45달러짜리 티셔츠를 입었다는 건 그가 어느 정도로 클린턴을 지지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윈투어는 1998년 12월호 보그 표지에 당시 퍼스트 레이디였던 클린턴을 정계 관계자로서 처음으로 게재하기도 했다.
윈투어는 올 1월 한 인터뷰에서 “힐러리가 여성이어서 지지하는 게 아니다. 그녀가 최고이기 때문에 지원하는 것이다. 그녀는 매우 강력한 유세를 펼치고 있으며, 자신감에 넘친다”고 극찬했다.
클린턴도 알아주는 ‘패션 피플’이다. 영부인 시절이나 아칸소 주지사 부인 시절에는 오스카 드 라 렌타의 드레스를 즐겨 입다가 국무장관 시절부터는 줄곧 바지 정장으로 ‘강한 여성’을 어필해왔다. 지난 2014년 고인이 된 오스카 드 라 렌타의 장례식에는 윈투어,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발렌티노 가라바니, 랄프 로렌, 마이클 코어스 같은 패션계 거물들과 함께 조문을 해 주목받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브랜드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지난 4월 뉴욕 유세에 1만2395달러짜리 아르마니의 트위드 재킷을 입고 나섰다가 맹비난을 받기도 했다. 당시 연설 내용이 소득 불균형과 고용 창출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명품 옷이 웬 말이냐는 것이었다.
이처럼 여성 리더와 패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특히 여성 리더의 의상은 패션 산업을 좌우할 수도 있기 때문. 대표적인 예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인 미셸 여사다. 그는 180cm의 훤칠한 키와 건강미 넘치는 몸매로 갭에서부터 제이슨 우에 이르기까지, 캐주얼부터 신진 디자이너 의상까지 다양한 패션을 선보여 패션계의 뮤즈로 자리매김했다. 뉴욕대 스턴스쿨에 따르면 그녀의 패션으로 인한 경제효과는 30억 달러에 이른다. 2008~2009년 그녀는 29개사 189벌의 의상을 소화했는데, 해당 제품들 가격은 평균 2~3% 올랐고, 심지어 그녀가 2008년 10월 투나잇쇼(The Tonight Show)에서 입었던 J.크루 의상은 사흘 만에 가격이 25%나 뛰었다.
한 멋하는 테리사 메이 영국 신임 총리도 미셸 여사에 버금가는 패션계 뮤즈다. 메이 총리는 취임식 날 영국 디자이너 아만다 웨이클리의 블랙과 네온 옐로를 매칭한 드레스, 여기에 역시 영국 브랜드인 러슬 앤 브롬리의 하이힐을 신었다. 이는 전 세계 패션 피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영국 첫 여성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는 버버리와 아쿠아스쿠텀 같은 영국 디자이너 정장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나라를 대표하는 정상이나 주요 정치인의 패션은 그들 나라의 패션 산업을 홍보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급 패션 산업에 활기를 불어넣고 싶다? 그렇다면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내세우기보다는 여성 후보에 투표하는 게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