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성우들이 들려준 교훈적인 이야기였다.
여름방학 동안 100권의 책을 읽기로 친구와 내기를 한 아이에게 누군가 제안을 한다. 무슨 책이든 읽기만 하면 순식간에 그 내용을 파악하는 능력을 주겠다고. 단,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고 단지 줄거리만 알게 된다는 조건이다. 조급한 아이는 제안을 단숨에 수락했고, 100권의 책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방학이 끝나갈 때쯤 녀석은 친구를 붙잡고 후회를 거듭했다. “100권 모두 내용은 쉽게 알겠는데 어떠한 재미와 감동도 느낄 수 없었어.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고 싶어….”
최근 김영하 작가의 3부작 독서 에세이의 마지막 편인 ‘읽다’를 잡았다. 이제껏 나는 후회하는 저 아이처럼 책을 읽어온 것 같다. 남들은 다 아는 책의 내용이 궁금해 서둘러 따라잡아야겠다는 조급함이 가득했다. 때로는 ‘이 책을 읽으면 좀 폼 나 보일 거야’라는 망상도 많았다.
김영하 작가는 ‘읽다’에서 소설을 읽는 이유를 ‘헤매기 위해서’라고 명확하게 말한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는 분명 교환이 불가능한 가치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나는 그 여정 위에서 얼마나 헤매봤는가. 제시된 이정표만 보고 그저 목적지에 안착하겠다는 일념으로 스쳐 가는 주위 풍경들은 놓친 채 고속도로를 달려온 것만 같다. 비단 독서에만 해당하는 반성이겠는가. 집에서, 회사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결과만 바라본 채 과정을 간과하지 않았던가.
고개를 돌려 책장을 봤다. 손때 묻은 책들이 가득하다. 여러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