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움증권의 ‘성공신화’ 중심에는 김봉수 전 부회장이 있다. 1999년 키움증권(당시 키움닷컴증권) 창립멤버로 참여한 그는 2001년 3월부터 2009년 4월까지 8년여 간 대표이사로 재직하며 키움증권의 성장기를 이끌었다. 키움증권의 성장을 통해 온라인 증권거래가 시장에 정착하는 데 누구보다 큰 공헌을 했다는 게 그에 대한 평가다. 또 민간 출신으로는 수십 년 만에 한국거래소 이사장 자리까지 올라 거래소의 해외시장 개척에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은퇴 후 자연인으로 돌아간 김 전 부회장을 이투데이 사옥에서 만나 현역시절 후일담과 한국 증권업계의 나아갈 길에 대해 물었다. 은퇴 후 고향인 충북 괴산에서 농사일하며 지내고 있다는 그에게 연재기사의 취지를 설명하자 “거목은 무슨, 그냥 나무 한 그루인 거지”라며 몸을 낮췄다.
◇ “김익래 회장과 만남은 행운…벤처기술 아는 분”= 김봉수 전 부회장은 1953년 충북 괴산출생으로 청주고와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33년간 증권업에만 몸담은 정통 증권맨이다. 1976년 쌍용증권의 전신인 효성증권 공채 1기로 증권가에 입문했다. 효성증권 시절에는 과장 신분으로 회사에 건의해 채권영업부서를 만드는 강단과 추진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외환위기는 증권사 직원으로만 살아온 김 전 부회장에게 급격한 변화를 가져 왔다. 1994년 SK증권 임원으로 스카우트됐던 그는 외환위기 당시 회사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4~5개 계열사 임직원을 자기 손으로 해고했던 것. 김 전 부회장은 “임원이고 직원이고 절반씩 잘랐으니 나도 나가야지”라며 “그래서 당시 대표이사와 함께 이듬해인 1999년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놀다가 그해 8월에 김익래 키움증권 회장을 만나 키움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김 전 부회장은 김익래 회장과의 만남에 대해 “운이 좋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먼저 벤처기술을 아는 창업자였고, 당시만 해도 금융업종에 돈을 대려면 용기가 필요했는데도 자본금 500억 원 중 300억 원 이상을 댔다. 또 경영에 대한 전반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겼다”며 “오너가 이래라저래라 했다면 키움증권이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사례로 든 것은 초기 키움증권의 인지도를 높였던 ‘신바람 이박사 TV광고’였다. “아줌마들 관광버스 등에서 활약하던 이박사를 섭외한 광고기획안을 가져왔다.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증권사라 딱히 내놓을 것도 없는 데다 튀어야 했기 때문에 선택한 광고였다”면서 “김 회장 스스로는 광고에 대해 너무하다는 반응이었지만 경영인을 믿고 오케이를 해줬다”고 했다.
◇ “콜센터 정규직으로 선발…고객 민원에 철저히 집중”= 사실 키움증권은 온라인 위탁매매를 처음 시작한 곳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 자본시장 역사에서 거대자본을 끼지 않고 출발한 신생 증권사가 주류 대열에 합류한 사례는 미래에셋증권과 키움증권 정도뿐이다. 그렇다면 키움증권이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게 한 요인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김 전 부회장은 가장 큰 성공 요인으로 “고객의 목소리에 철저하게 귀를 기울인 점”을 꼽았다.
지점을 통해 고객과의 접점을 갖는 기존 증권사와 차별점이 필요했다. 김 전 부회장은 콜센터 직원 전원을 정규직으로 선발한 것을 중요한 포인트로 언급했다. “비정규직이거나 외주용역을 통해 운영하는 기존 증권사 콜센터를 보면 일이 험악한데도 월급이 정규직 직원의 절반 수준이었다”면서 “그래서는 서비스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정규직으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고정비용을 우려한 내부의 반론도 있었지만 김 전 부회장은 이를 밀어붙였다.
정규직으로 콜센터 직원을 선발한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고 한다. 이미 업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직원들이 키움증권으로 몰렸고 회사와 일체감을 느낀 콜센터 상담원들은 고객 응대의 수준이 높았다. 김 전 부회장도 그만큼 관심을 기울였다. 고객센터와 회사 게시판을 통해 접수된 고객의 요구사항을 매일 임원회의에 올렸다. 사소한 민원이라도 무조건 처리하고, 당장 처리할 수 없는 경우에도 답변을 남기도록 했다.
HTS(홈트레이딩시스템)가 느리다며 항의하는 고객에게는 IT직원을 지방으로 보내 직접 문제를 파악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김 전 부회장은 “시간이 지나니 입소문을 타고 고객들이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면서 “게시판에 욕설을 올리던 고객도 우리 편이 되더라”고 말했다.
◇ “MB가 임명했으니 ‘MB맨’ 맞지…신경쓰지 않고 소신껏 일했다”= 김 전 부회장은 2009년 통합 한국거래소의 3대 이사장에 오르기도 했다. 오랜 기간 관료출신의 무대였던 거래소 이사장 자리에 민간 출신 인사가 발탁된 것은 수십 년 만의 일이었다. 키움증권을 성공시킨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였지만 일각에서는 그에게 ‘MB맨’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기도 했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민감한 부분이었지만 김 전 부회장은 “MB가 임명했으니 MB맨 맞지 않느냐”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했으면 ‘박근혜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아니냐. 세간에서 어떻게 부르든 말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전 이사장은 “외부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소신껏 일했다”면서 ”사심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일한다면 잃을 것이 뭐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는 거래소 이사장 재임기간 기억에 남는 일로 복수노조 통합을 꼽았다. 한 때 ‘한 지붕 네 노조’로 내부분열 양상이 있었던 거래소 노조를 하나로 통합한 일이었다. 또 거래소의 합종연횡 속에서도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했던 한국거래소가 라오스, 캄보디아에 증시를 개장하고 베트남과의 시스템 계약을 체결하거나 일본 동경거래소와 연계거래 구축을 해낸 일 등을 보람있는 일로 꼽았다.
올해 국민의 당에 입당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는 “안철수 대표가 보자고 하더라.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이분법적 진영논리 혁파하자고 하는데 내 생각과 많은 부분이 일치했다”면서 “개인적으로 성공하고 재산도 많은 안 대표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데 정치권에 뛰어든 진심을 높이 생각했다. 현실정치에 참여하지는 않겠다는 조건으로 입당하게 됐다”고 말했다.
◇ “농사짓는 노인이지만…한국경제 가계부채는 걱정”= 오랜 기간 자본시장의 최전선에 몸담았던 원로로서 국내 증권업계가 나아갈 방향을 물어봤지만 김 전 부회장은 자신을 ‘농사짓는 노인’이라고 강조하며 말을 아꼈다. 다만 그는 “전체적인 경제상황을 보면 우려가 든다”고 말했다.
김 전 부회장은 각국 중앙은행과 정부가 돈을 풀고 있음에도 경기가 좋아지지 않는 상황을 우려했다. 그는 “구멍이 난 풍선에 바람을 계속 주입하는 격”이라며 “어느 순간 재정투입이나 통화량 증가정책을 멈추는 순간 풍선이 힘없이 늘어져 버릴 수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 그는 “특히 우리나라 국민의 가처분소득이 계속 줄고 있는데, 앞으로 금리가 1%만 올라도 엄청난 사회경제적 불안요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국내 증권사들에 대해 “키가 큰 사람은 높은 곳에서 먹거리를 찾을 필요가 있는데 지금 자본금 100억 원짜리 회사나 5조 원짜리 회사나 똑같은 영업을 하고 있다. 이래서는 유지될 수 없다”면서 “세계 시장에 나가면 우리가 모르는 먹거리가 많다. 덩치가 큰 회사는 모험스럽더라도 세계로 진출해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