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세에 죽은 한 여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름답고 총명했으며 모차르트와 바하, 그리고 비틀스를 사랑했고…저를 사랑했습니다.”
나는 영화 ‘동주’를 보고 이렇게 자문자답한다. “스물여덟 해에 죽은 한 청년에게 우리는 어떤 위로의 말을 던져야 할까요? 착하고 잘생겼으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랑했고, 그리고 조국을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영화 ‘동주’를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었다.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묻는다. “선생님, 우리나라가 일본하고 축구나 야구로 붙으면 비등비등하잖아요? 근데 왜 그때는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나요?” 피눈물 나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듣다 못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얻어터지기만 한 못난 조상이 원망스러웠을까? 이 질문에 이제 우리는 냉정하게 대답해야만 한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머리맡에 둔 조선의 입장에서 중국과의 사대외교는 어쩌면 생존본능이었는지 모른다. 반만년 역사에 남의 나라에 직접적 통치를 받았던 시기는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점령 시대뿐이다. 잔인하기로 소문난 몽골 대제국도 우리를 간섭(고려시대 원나라 간섭기)하기는 했을지언정 친정하진 못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우리 역사가 망가지기 시작했을까?
세계사로 일단 외연을 확장해 보자. 18세기 후반, 영국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유럽 열강들은 제국주의 침탈을 노골화하기 시작한다. 제국주의란 식민지를 시장으로 개척하는 것과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착취하는 게 첫 번째 목표가 아니던가? 이들 국가는 동양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중국과 일본에 함포를 겨냥한다.
일본은 이른바 메이지(明治) 유신을 통해 부국강병의 기틀을 만들어냈다. 이들의 모델은 영국이었고 급속도로 산업을 일으키고 국방력을 괄목상대하게 키웠으며 개화의 깃발 아래 사회 전반에 서구적 개혁정책들을 펼쳐 나갔다. 국력이 무섭게 성장한 것이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1800년에 정조가 급작스럽게 승하하고 이후 60년간 이른바 세도정치가 이어진다. 노론과 소론 등 당파적 입장을 명분 삼아 버티던 조선 정치판은 이제 안동 김씨냐 풍양 조씨냐 하는 천박한 수준의 가문 정치 지배구조가 고착된다. 관료는 썩을 대로 썩었고 백성은 핍박받았으며 개혁적 지식인은 무시되었다. 이웃 일본을 ‘왜’라 하며 여전히 한 수 아래로 보았고 무슨 문제가 생기면 청나라의 보호로 들어가면 된다는 안이한 사고방식이 당시 조선의 지배층 마인드였다. 안 망하면 이상한 거 아니겠는가?
사실 조선사에서 아쉬운 지점을 찾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임진왜란 이후, 권력의 손바뀜을 이뤄내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은 임란 이후 망했어야 했다. 이씨 조선을 끝내고 새로운 국가권력이 건설됐어야 했다. 명나라도 일본도 임란 이후 정권이 바뀌었다. 노쇠하고 무능한 국가권력은 국민에게 엄청난 해를 줄 뿐이다. 조선은 어인 일인지 임란과 호란을 거치고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지배이념인 성리학은 양반 기득권을 위한 통치 이념으로 변질되었으며 피지배층은 더 이상 양반을 존경하지 않았다.
대원군의 섭정은 쇄국정치로 인해 잃어버린 10년을 만들었고 고종의 친정시기는 황제권을 지키기 위한 정치일 뿐이었다. 청나라와 일본은 남의 나라 땅에서 전쟁을 일으켰고, 숨죽여 힘을 키우던 일본은 청나라를 제압하더니 1904년 러일전쟁에서는 전 세계가 놀랍게도 러시아까지 물리쳤다. 당시 일본의 육군 병력은 100만 명에 육박했으나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군대 병력은 왕실을 호위하기 위한 인원 1만여 명에 불과했다. 그렇게 조선은 망했다.
영화 ‘동주’의 서사를 끌어가기 위해선 동주 말고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가 바로 사촌 송몽규였다. 몽규는 동주가 가고자 하는 목표점에 이미 가 있는 인물이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도, 본인은 낙방한 일본의 교토(京都)대학 합격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기 있게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런 몽규를 동주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 동주도 우리와 똑같이 열등감을 느꼈을 것이다.
영화가 흘러가는 중에 자주 동주의 시가 인서트된다. 동주의 시로 이야기의 흐름을 잇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다. 그러나 억지스럽지 않다. 극의 전개상 필요하다면 팩트를 다소 변형한다. 예를 들면 참회록이 씌어진 때는 영화와 달리 몽규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시기가 아니라 일본 유학길에 창씨개명을 하고 난 직후였다. ‘히라누마 도주’, 동주의 일본 이름이다. 그때 쓴 시가 바로 참회록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
서사의 완성에 그의 시는 큰 역할을 한다. 일전에 김광석의 뮤지컬에 노래 ‘일어나’를 화장실에서 변비로 고생하는 남편에게 불러대 실소를 머금게 했던 억지스런 구성과는 대별된다.
우리는 이육사나 윤동주 시인을 저항시인의 원조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 어느 구석도 ‘일본 놈들 갈아 마시자’ 같은 거친 구호와 생경한 언어는 보이지 않는다. 윤동주는 섬세한 감성과 인간애를 바탕으로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시를 썼을 뿐이다. 일제의 만행으로 볼 때 동주의 시는 저항이었다. 야만의 식민시대로 볼 때 동주의 시는 불온이었다. 그는 저항을 서정으로 승화한 천상 시인이었다.
잘생긴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를 일별해 봤을 때 감독도 약간은 고민했을 것이다. 로맨스가 있을 만한데 실제로 다룰 만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연희전문 시절 여학생과 썸을 잠깐 타고 일본에서 동주를 좋아하는 문학소녀가 등장하는 게 영화에선 전부다.
서울 종로구 수성동에 있는 윤동주문학관 기념비석에는 서시가 씌어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난 괴로워했다.’
시가 담아낼 수 있는 서정성과 시인만이 견지할 수 있는 도덕성이 완벽한 일치를 보이는 첫 문장이다. 어찌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 수 있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은 첫 문장에서 좌절감을 맛본다. 도달하기 어려운 지점에 윤동주는 이미 와서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안긴다. 부.끄.러.움. 바로 이거다. 윤동주의 시와 영화 ‘동주’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한마디로 담아낸다면 ‘부끄러움을 알고 부끄럽다고 느끼라’는 거다. 그러나 부끄러운 줄 알라는 말이 결코 질책이나 훈계로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부끄럽다. 너도 그렇지 않니? 하는 동의를 구하는 호소이다.
윤동주는 평생을 부끄러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윤동주는 생전에 시집을 한 권도 발간하지 못한다. 아직도 윤동주와 송몽규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혈액이 부족했던 일제가 조선인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벌였으며 후쿠오카(福岡)형무소에서 두 사람도 식염수 주사를 맞은 걸로 추정되며 불과 해방을 몇 달 앞두고 낮선 이국에서 죽어갔다.
동주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본다면 어떤 시를 쓸 수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상실했거나 거세된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온갖 추문과 사건·사고로 뉴스를 얼룩지게 하는 그들에게 동주의 부끄러움을 십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기대한다면 연목구어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