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신탁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에 가입한 A씨는 역 환매조건부채권(RP)과 채권형펀드 위주로 자산을 배분했다. 최장 5년 장기 투자인 만큼 성장종목 위주의 주식형 펀드에 가입하라는 자문인의 권유가 썩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9일 한국은행 기준금리 인하 이후 예·적금 자산 이전을 고민 중인 B씨도 채권형 펀드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주변에서는 최근 주가가 1900선까지 떨어지면서 코스피지수 상품이나 가치주 펀드 등도 나쁘지 않다고 추천했지만 채권 투자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수익률을 위해 마음을 졸이기 싫다는 판단에서다.
실제 연초 이후 국내 주식형 펀드(공모)에서 3조2100억 원이 빠져나갔다. 반면 국내 채권형 펀드로는 4조2997억 원, 머니마켓펀드(MMF)로는 21조2413억 원이 유입됐다. 최근 3년간 자금이동 경로도 국내 주식형에서는 13조2762억 원이 유출된 반면, 채권형과 MMF로는 각각 8조8271억 원, 33조2642억 원이 들어왔다.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으로 자금을 실어 나르는 것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현재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중장기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채권 가격 강세를 이끌어 온 브렉시트가 무산되더라도 글로벌 경기 성장세가 더뎌지는 상황에서 구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것으로 봤다.
김영일 대신증권 연구원은 “브렉시트가 무산되면 단기적으로 안도감이 생기면서 그간 올랐던 채권가격이 하락할 수 있다”며 “그러나 경기 자체가 좋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강세 속도만 줄어들 뿐 채권가격이 현재보다 크게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과 유럽 등 국가에서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조정한 사례에 주목했다. 부진한 경기를 살리려면 금리를 내리거나 동결해야 하고 이런 상황이 채권 강세로 이어지는 고리로 굳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 연구원은 “단순히 브렉시트 무산 등 일시적 우려 요인이 해소되는 것을 넘어 경기가 확실히 좋아진다는 신호가 나타나야 안전자산으로의 쏠림현상이 개선될 수 있다”며 “가장 확실하게는 중국의 경기 개선이 나타나야 하지만 아직은 그런 신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성윤 현대선물 연구원도 “현재 채권시장으로의 쏠림현상은 정책과 경기 등 여러 측면에서 나타나는 답보상태가 원인”이라고 짚었다. 특별히 경기가 침체됐다고 보긴 어렵지만 저성장이 장기화되는 상황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올해 3월부터 가입자를 받은 ISA에 투자금 대부분이 RP와 채권형펀드에 쏠린 것도 이 같은 해석을 방증한다는 분석이다. 투자자가 직접 투자상품을 고르는 신탁형 ISA에서 은행 가입자금의 62.1%가 예·적금, 증권 가입자금의 50.3%가 RP에 몰렸다.
다만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하반기까지 지속되기 어렵다는 관측도 있었다. 백윤민 교보증권 연구원은 “브렉시트가 일어나도 당장 영국이 탈퇴하는 것은 아니다. 하반기 미국 금리 인상에 대한 기대감도 남아 있다”며 “현재 커질대로 커진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하반기까지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연초 이후 주식시장에서 이탈한 자금이 다시 위험자산으로 회귀하기는 어렵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지난 17일 현재 국내 주식형펀드의 연초 이후 수익률은 2.24% 손실을 낸 반면 채권형펀드와 MMF는 각각 1.6%, 0.65% 수익을 지키고 있다.
백 연구원은 “브렉시트가 무산된다고 해서 당장 위험자산에 대한 안도감이 형성되긴 어렵다. 글로벌 경기 회복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시중에 떠도는 자금만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