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총리는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이고 동독 출신이다. 1954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목사인 아버지가 동독으로 이주하며 동독에서 성장했다.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연구소에 근무한 평범한 동독 주민이었다. 1989년 동독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 가담한 것이 그녀가 최초로 정치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1990년 12월 실시된 통일 독일의 총선에서 메르켈은 연방하원에 진출했고, 당시 헬무트 콜 총리는 무명의 젊은 동독 여성 메르켈 의원을 1991년 여성-청소년 장관에 발탁했다. 메르켈이 처음 언론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놀랐다. 수줍은 모습에 이마를 덮은 짧은 단발머리와 너무나 수수한 옷차림을 한 평범해 보이는 젊은 동독 여성, 언변도 별로 없는 이 여성을 노련한 정치가인 콜 총리가 장관으로 발탁한 이유를 궁금해했다. 그러나 콜 총리는 사람을 보는 눈이 예리한 정치가로 잘 알려져 있다.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은 바로 이 겸손함과 평범함 뒤에 숨어 있다. 메르켈은 콜 총리 내각에서 환경장관을 역임하고, 1998년엔 기독교민주당(CDU)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 후 메르켈의 도덕적 가치와 정치적 진가를 보여주는 여러 사건이 발생했고, 동시에 그녀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1998년 9월 총선에서 패배한 콜 총리에게 불법 정치자금 수임 문제가 불거졌는데, 1999년 12월 16일 개최된 청문회에서 콜은 기민당 당수로서 편법적인 정당지원금 수임은 인정했으나 끝까지 자금을 준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이에 독일의 여론이 들끓었다. 1999년 12월 22일 메르켈 사무총장은 유력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에 콜을 비판하며 명예당수직 사퇴를 촉구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메르켈은 기고문에서 콜은 그동안 국가를 위해 많은 기여를 했고, 기민당은 장래 발전을 위해 이제 거인 콜로부터 독립하고 스스로 두 발로 서서 걸음마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 정치계는 충격했고, 국민들은 환호했다. 수십 년 동안 독일 정치를 주름잡고 독일 통일을 달성한 콜 총리에게 아무도 감히 공개 비판을 못하던 당시 독일의 정치 문화에서 콜 총리의 발탁으로 정치가로 성장한 젊은 여성, 그리고 당의 현직 사무총장이 언론에 공개적으로 ‘정치적 아버지’인 콜을 비판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기민당은 당 최고위원 중 정치자금 수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찾을 수 없었고, 2000년 4월 메르켈을 신임 당수로 선출했다. 그녀는 현재까지도 기민당 당수다. 정계에서는 메르켈이 고도의 정치적 계산을 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불법 정치자금에 연루된 지도자가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국민들은 메르켈의 도덕성과 결단력을 평가했다.
메르켈의 정치적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기민당(CDU)과 바이에른주를 대표하는 기사당(CSU)은 기민/기사 자매 정당으로 중앙정치에서 항상 연합한다. 총선에서 총리 후보는 큰 정당인 기민당의 당수가 선출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당시 기사당 당수 겸 바이에른주 총리 스토이버(Stoiber)는 강력하게 총리 후보를 희망하고 있었다. 메르켈 기민당 당수는 2001년 1월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뮌헨으로 가서 스토이버를 방문하고 자신의 총리 후보직을 양보했다. 무언가를 원하는 측이 상대방을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메르켈은 상대방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스스로 찾아가 양보하는 파격적인 정치적 제스처를 썼다.
스토이버는 총선에서 사민당(SPD) 총리 후보 슈뢰더(Schroeder)에게 패배했고, 그 다음 총리 후보로 메르켈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정책도 지지해주는 든든한 정치적 동반자 역할을 했다. 메르켈은 이미 고도의 정치 계산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2005년 총선에서 메르켈은 슈뢰더 총리에게 승리했고, 현재까지 성공적으로 총리직을 역임하고 있다.
메르켈은 자연과학자답게 사실에 입각한 정확한 계산, 강풍에 맞서지 않고 역이용하는 정치적 상황 판단,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정치적 스타일을 보여준다. 메르켈은 조용한 작은 걸음을 통해 결국 큰 그림을 그려내는 스타일이다. 동독의 시골에서 목사의 딸로 보통사람들과 어울리며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며 서민을 이해하고 도울 줄 아는 성장 배경이 메르켈 정치 스타일의 근본을 이룬다. 국민들은 소박한 총리를 ‘무티 엔지’(엄마 앙겔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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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유입에 상한선은 없다”…총리 연임 반대 64%, 위기 넘을까
2015년 한 해에 독일에 유입한 난민은 110만 명이다. 특히 2015년 9월 4일 메르켈 총리가 시리아 등 전쟁지역의 난민은 ‘더블린 조약’(유럽의 도착 국가에서 난민 신청을 해야 한다는 내용)과 관계없이 독일로 올 수 있다고 발표한 후, 시리아 난민 유입이 급증했다. 메르켈 총리는 연설에서 난민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한다는 유럽연합의 기본 정책을 포기하는 것이라며, 독일 난민 유입에 상한선은 없다고 밝혔다.
2015년 독일에 유입된 난민 중 약 절반은 시리아 출신, 다음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알바니아, 코소보, 모로코, 알제리, 소말리아, 에리트리아 등의 순서다. 발칸지역의 국경 차단 정책으로 발칸루트가 막힌 현재는 이집트와 리비아를 통한 지중해 루트로 난민들이 유입되고 있다. 2016년 5월까지 독일에 들어온 난민은 약 30만 명이고 올해 말까지 약 75만 명의 난민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한다.
독일연방정부는 2016년 난민지원 비용으로 400억 유로를 책정했고, 2020년까지 900억 유로의 비용을 예상하고 있다. 난민이 독일 경제에 기여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난민들이 독일어를 배우고 독일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상황이 될 때 가능한 장래 얘기다. 난민문제는 인도적인 문제로 취급되고 있다.
독일은 전쟁과 분단, 통일 전과 유고 내전 시 수많은 난민 유입을 경험하며 난민에 상당히 관대했지만, 한 해에 백만 명이 넘는 이슬람 문화권의 난민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매우 다르다.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난민을 돕는 반면, 난민 주거지 마련부터 안전문제까지 수시로 충돌하는 각종 사회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2015년 말 쾰른 대성당 앞 새해맞이 축제에서 약 1000명의 북아프리카 출신 난민들이 여성들을 둘러싸고 폭력행위를 한 사건이 발생해 독일 전역을 경악하게 했다. 경찰에 신고된 사건은 1076건으로 그중 384건이 성폭력, 나머지는 폭행과 강도사건이었다. 지난주 6월 6일 시작된 이슬람의 라마단에 맞춰 제공된 음식에 불만을 품은 난민 두 명이 건물에 방화해 난민촌으로 사용되었던 뒤셀도르프 산업박람회장 건물이 완전 소각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독일사회에 반(反)난민 정서와 극우파가 증가하고, 메르켈의 난민정책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자매 정당인 기사당도 메르켈 총리의 난민정책을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2015년 12월 메르켈 총리의 난민정책에 대한 반대는 49%였으나, 현재는 61%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5월 말 여론조사에서는 2017년 9월 실시될 총선에서 메르켈 총리의 연임 반대가 64%로 나타났다.
앙겔라 메르켈은 난민문제 위기를 넘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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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대 철학박사. 대통령 독일어 통역. 주 독일 대사관 공사, 주 세르비아 대사 역임. 저서 ‘20대, 세계무대에 너를 세워라’. 독일에서 30년간 생활했고, 퇴직 후 매년 여름 3개월간 베를린 체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