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그녀는 ‘어미’다

입력 2016-06-0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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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베란다 앞 목련나무에 산비둘기가 둥지를 틀었다. ‘그녀’(느낌상 암컷인 듯!)가 산비둘기라는 것은 여러 지인에게 사진을 찍어 보낸 결과 알게 된 사실이다. 두 딸아이는 무척 신기해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비둘기를 살폈다. 어느 날 큰아이가 “알을 품고 있는 것 같아요. 며칠째 몸을 웅크린 채 꼼짝도 안 해요”라고 했다. 그 말에 호기심이 생겨 베란다에 나가 보니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둥지를 지키고 있었다. “지렁이를 사다 먹여야 해요” “새 둥지에 솜을 깔아줘야 해요”…. 아이들은 비둘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끊임없이 말했다. 2주일여 지난 지금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아기 새 두 마리가 있다. 생각보다 몸집이 크고 움직임도 활발하다. 먹이를 물어다 새끼 입에 넣어주는, 텔레비전에나 나오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산비둘기 가족을 보면서 생명의 소중함과 더불어 어버이의 크나큰 자식 사랑을 생각했다. 어버이의 옛말은 아비어미다. 아비는 아버지 혹은 결혼해서 자식을 둔 아들 등 남자를 두루 칭하는 말이다. 어머니 혹은 결혼해 자식을 둔 딸 등 여자를 두루 일컫는 말은 어미다. 그런데 “낮술에 취하면 애비에미도 못 알아본다”는 우스개처럼 애비, 에미가 발음하기 더 편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는 우리말에서 흔한 ‘ㅣ’모음 역행동화, 즉 앞 음절의 후설모음 ‘ㅏ, ㅓ, ㅗ, ㅜ’가 뒤 음절에 전설모음 ‘ㅣ’가 오면 이에 이끌려 ‘ㅐ, ㅔ, ㅚ, ㅟ’로 변하는 현상 때문이다. 그런데 ‘ㅣ’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난 말은 방언으로 봐서 원칙적으로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애비’, ‘에미’가 입에 착착 감겨도 원형인 아비, 어미만이 바른말이다. 같은 이유로 애기, 오래비, 왼손잽이, 아지랭이, 곰팽이 등은 아기, 오라비, 왼손잡이, 아지랑이, 곰팡이 등으로 써야 한다. 그런데 ‘ㅣ’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난 형태가 굳어 표준어로 인정받은 경우도 있다. 풋내기, 냄비, 동댕이치다, 신출내기 등이 대표적이다.

‘ㅣ’모음 역행동화 현상은 강원도 방언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지 싶다. 두루매기(두루마기), 대리미(다리미), 지렝이(지렁이), 누데기(누더기), 괴기(고기) 등 여러 단어를 단숨에 나열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퇴끼(토끼), 쇡이다(속이다), 모탱이(모퉁이), 쥑이다(죽이다), 멕이다(먹이다) 등 다른 지역에도 같은 현상에 따른 사투리가 존재한다.

‘ㅣ’모음 역행동화와는 거리가 있지만 이중모음을 맛깔나게 잘 구사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요리하는 연기자’ 이정섭씨다. 여자 뺨치는 빠르고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그는 특유의 말투로 많은 유행어를 낳았다. “비 오는 날엔 맥걸리(막걸리)와 패전(파전)이 최고야~ 뭐든 맛이 없을 땐 챔기름(참기름) 두 뱅울(방울)이면 끝이지 뭐” “샘계탕(삼계탕) 속에 챕쌀(찹쌀)은 진리야~”…. 가끔은 그의 정감 어린 말투가 그립다. 표준어가 아니면 어떠랴. 가슴 아픈 사건·사고가 이어지는 요즘,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웃음을 준다면 사투리의 가치도 매우 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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