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의 세계에서 하정우를 만나는 것은 분명 흥분되고도 낯선 일이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에서 하정우가 연기한 캐릭터는 사기꾼 백작. 보통의 장르영화에서 여자를 유혹하는 캐릭터가 지닐법한 ‘뻔한’ 상투성이 하정우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말끔하게 지워졌다. 하정우에게 ‘아가씨’는 ‘연극적인 상황을, 문학적인 대사와 일본어로 구사해야 하는’ 극한의 미션이었을 것이다. 그 속에서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분명하게 심은 건 하정우라는 배우의 능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Q. ‘아가씨’에서 보여준 연기 양식은 이전의 영화에서와는 분명 다릅니다. 연극적이랄까요.
하정우: 박찬욱 감독님의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일본어 대사가 반 이상이라는 점도 영향을 줬을테고요. 말씀대로 뭔가 연극적이고, 대사 자체가 문어체적인 느낌이 많아요. 그것을 다르게 표현해 볼까 고민도 했는데, 자칫 더 어설퍼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다면 차라리 더 딱딱하게 대사를 처리하는 게 맞다고 봤죠.
Q. 그럼에도 모든 캐릭터에 하정우라는 사람이 투영돼 있는 느낌입니다. ‘암살’의 하와이 피스톨이 하정우가 지닌 유머와 여유를 만나 매력을 더한 경우라면, ‘멋진 하루’나 ‘아가씨’는 능청스럽고 귀여운 하정우의 어떤 특성이 캐릭터에 영향을 준 경우죠. 악인인데도 미워할 수 없는 건, 그 때문 일 테고요.
하정우: 백작의 경우, 조금 더 순진하게 보이려고 했어요. 조금 더, 애 같은. 조금 더, 귀여운 느낌을 내려고 했죠. 백작은 의상부터 많은 게 멋스럽고 디자인이 돼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연기는 조금 더 나사를 풀어서 하려고 했죠.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설득력. 백작이 아가씨(김민희)와 코우즈키(조진웅)를 설득시키는 것은 곧, 관객을 설득시키는 거잖아요. 그랬을 때 어떤 무기를 가지고 가야 하나, 싶었죠. 생각해보세요. 사기는 어수룩한 사람에게 많이 당해요. 완벽한 사람은 의심을 하게 되니까. 그런 부분을 생각하면서 캐릭터를 잡았죠.
Q. 아가씨가 신사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낭독회 장면은 꽤나 변태적입니다. 독회 공간은 남자들의 판타지가 응축된 곳이죠. 성(性)적인 걸 떠나서, 하정우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나요.
하정우: 옮겨 다니는 것 같아요. 거의 술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죠.(웃음) 그런데 저는 한강에서 많이 놀아요. 걷는 거죠. 제가 핏빗(Fitbit)을 한지 딱 1년이 됐어요. 지인들과 단체 방을 만들어서 실시간으로 기록을 공유해요. 그걸로 순위 경쟁을 하죠. 23명이 함께하는데 7등까지 면제. 그 다음부터 500원~1000원. 500원 단위로 벌금을 내는 게임을 매일하고 있어요. 사실, 요즘은 그것만 하기에도 벅차요. 어디 ‘아방궁’에 갈 시간 없이.(일동폭소)
Q. 촬영이 끝난 후 박찬욱 감독님이 손수 찍은 사진을 배우들에게 선물했다고 들었어요. 아무 사진이나 선물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신과 가장 닮았거나, 혹은 당신의 개성이 가장 드러난 사진을 주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하정우: 아, 그 사진이 공개됐어요. 저는 독회장면. 연미복을 입고 있는데, 신발은 운동화죠. 저를 보면 그런 게 재미있으신가 봐요. 얌전한 척 하고 말도 조근 조근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농담을 치고 있는, 그런? 그런 아이러니한 지점이 ‘아가씨’에도 많아요. 박 감독님이 지닌 요소들 중에 제가 가장 사랑하는 것도 그런 블랙코미디고요.
Q. 초기작에 출연할 당시의 하정우를 애착하는 팬들도 많습니다.
하정우: 네. 정말 좋았던 시간입니다. 그때의 저는 귀엽고, 거칠고, 거칠기에 뜨거웠던 에너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걸 유지할 수 있으면 너무나 좋겠죠. 어떻게 하면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저도 고민 중이에요. 그런데 제 경우에는 작품을 통해 만난 감독이나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그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그러면서 성장해 나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Q. 올해 ‘아가씨’로 칸국제영화제에 다녀오셨죠? 벌써 다섯 번째입니다.
하정우: 제가 윤종빈 감독과 ‘용서받지 못한 자’로 칸을 간 게 정확히 10년 전입니다. 그래서 올해 지난 10년을 돌아봤어요. 저는 배우 하정우로서 이름을 알리려고, 커리어를 쌓으려고 열심히 작업 해왔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앞으로의 10년을 어떤 마음으로 가지고 갈 것인가가 제겐 중요한 과제죠. 결론은, 좋은 감독님들의 좋은 작품에 제가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많아요. ‘아가씨’도 그런 생각의 일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