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화 국회의장은 25일 퇴임 기자회견을 하고 대한민국의 정치를 바꿀 것을 주문했다.
정 의장은 “의회주의를 강조하던 의원들이 행정부로 가면 국회를 거수기나 통법부로 여긴다”며 3권 분립을 강조하고, “87년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며 개헌의 불씨를 당겼다.
또 자신이 발의한 상시 청문회법(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낡은 정치를 바꾸고 정치 틀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행정부가 국민의 편에 서서 올바르게 일하라고 만든 법을 ‘귀찮다’고 ‘바쁘다’는 이유로 반발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정의화 국회의장의 퇴임 기자회견 전문이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국회 가족과 언론인 여러분,
이제 나흘 후 저는 국회의장 임기를 마칩니다.
지난 2년 동안 제19대 국회 후반기 의장직을 맡아
숨 가쁘게 달려 온 여정을 뒤로 하고 국회를 떠나게 됩니다.
부족한 제가 국회의장의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두 분 부의장님을 비롯한 선배·동료 의원 여러분,
사무총장님을 비롯한 모든 국회 가족 여러분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전반기 의장과 후반기 의장이 단절 없이 이어져
국회의장 공백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국회법 관련 규정이 생긴 1994년 이후 20년 만이었습니다.
저에게 온전히 주어진 2년이라는 임기를
국민 여러분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로 생각하고,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2년이었습니다.
저는 의장으로 선출된 직후 본회의장에서
“우리 국회의 혁신, 소통, 화합을 이루고,
우리 국회를 품격 높은 선진 국회로 만들어
국민적 신뢰를 되찾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집무실에 ‘참을 인(忍)’자를 써서 걸어놓고,
어떻게든 소통과 타협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새로운 국회의 모습을 보여드리고자 했습니다.
의장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재량권을 발휘해
교섭단체 간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초선의원 때부터 참으로 의아하게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의회주의를 그렇게 강조하던 의원들이
행정부로 가면 국회를 필요에 따라
거수기나 통법부로 여기곤 한다는 점입니다.
삼권이 서로를 존중하고 예를 갖추는 가운데
국민의 삶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함께 노력하라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구조입니다.
입법부 수장으로서
우리 국회가 삼권분립의 튼튼한 토대 위에 반듯하게 나아가고
상생의 정치, 합의의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헌법과 법률에 따라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국회의 교착상태를 풀었고,
예산안을 헌법과 법률이 정한 시한 내에
원만히 처리하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김영란법, 공무원연금 개혁 등 주요 법안들도
여야 합의로 처리했습니다.
연중 상시국회 운영, 대정부질문제도 개선,
위원회 청문회 제도 활성화 등 국회운영제도 개선을 통해
일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한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믹타 국회의장 회의, 유라시아 의장회의, 한일의회 미래대화 등
국익을 위한 의회수장외교 활동도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지난 주말 국회 잔디밭은 아이들 웃음소리로 가득했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가족의 손을 잡고 국회 잔디마당을 찾아주셨습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준공 후 40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국민들의 품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사랑과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민생과 경제를 살리기 위한 법안들을 제때 처리하지 못한 점,
정쟁의 구도를 끊어내기 위한 정치개혁을 이루지 못한 점,
국가 미래를 위한 중장기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점,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남북국회회담을 성사시키지 못한 점 등은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무엇보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국민들을 위해
국회는 도대체 무엇을 했냐는 따가운 질책에
안타깝고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곧 개원할 20대 국회는
19대 국회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국가 전반에 산적한 과제들을 풀어내고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되찾는 국회가 되기 바랍니다.
특히, 협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정치개혁을 이루고,
중요한 국가적 미래과제들에 대해 여야가 함께
대안을 찾을 수 있는 ‘국회미래연구원’ 설립 등의 과제는
빠른 시일 내에 성과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이 자리는 저의 국회의원 20년을 마무리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권력의 대세를 쫒지 않고,
부끄럽지 않게 정치적 소신을 지켜왔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국회를 떠나면서제가 바라보는 우리 정치가
대단히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10년 후 대한민국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한국경제를 책임지던 여러 산업 분야에
동시다발적으로 경고등이 들어오고 있는 국가적 위기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지역과 이념의 기득권 질서에 안주하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과 나태 속에 빠져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국민이 아니라 권력자를 바라보는 정치,
국익과 민생이 아니라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정치가
되어가는 것 같아 참으로 답답합니다.
지난 4.13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은 명확합니다.
‘정치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구태의연한 이념적 색안경으로 서로를 적대시하고,
조금만 생각이 달라도 내 편이 아니라며 배척하며,
편 가르기에만 몰두하는 한심한 정치를 그냥 둘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정치가 문제를 악화시키던 시대를 끝내고,
산적한 국가적 문제를 정치가 해결하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나라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일,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대응할 해법을 찾는 일,
날로 더해가는 사회적 격차문제를 해소하는 일,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질서를 정착시키는 일 등
당장 우리 정치가 소매를 걷어붙여야 할 일이 산적해 있습니다.
우리 정치, 이제는 정말 달라져야 합니다.
협치와 연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가 필요합니다.
무능한 정치를 유능한 정치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선, 아직도 권위주의 시절에 살고 있는 정치권 일부와
구시대적 행정편의주의에 젖어있는 일부 공직사회의 인식부터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권력이 국민 위에 군림하던 시대는 오래전 끝났습니다.
국회운영제도 개선 내용을 담은 국회법 개정안 중
상임위 청문회 활성화 부분을 두고
일부에서 ‘행정부 마비법’이라는 비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국민을 대신해 국정을 감사하고, 특정한 국정사안을 조사하는 것은
헌법 61조에 규정되어 있는 국회의 당연한 책무입니다.
정책적으로 현안조사가 필요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책과 대안을 마련하여
국민들의 걱정을 하루속히 풀어드려야 할 의무가 국회에 있습니다.
그런 문제에 정치가 제때 응답하지 못했고,
원 책임소재는 제대로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일 잘하는 국회,
정부를 제대로 감독하고 견제하는 국회를 원하고 계십니다.
행정부가 국민의 편에 서서 올바르게 일하라고 만든 법을,
‘귀찮다’고 ‘바쁘다’는 이유로 반발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의 일부 청문회에서 나타났던 부정적 측면만 강조하며
정책 청문회 활성화 자체에 반대하는 것 또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다.’는 식의 회피성 주장일 뿐입니다.
저는 상임위 청문회 활성화를 비롯해
연중 상시국회 운영 등의 내용을 담은 개정 국회법이,
이번 정부가 임기 끝까지 국정을 원만히 운영하는 데
오히려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낡은 정치를 바꾸려면, 정치의 틀 역시 바꾸어야 합니다.
낡은 이념과 진영논리를 벗어던져 국민 화합과 통합을 이룰 수 있고,
국민과 국가를 위해 언제든 초당적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며,
국민들의 목소리를 더욱 폭넓게 수용하여 갈등을 녹여낼 수 있는,
새로운 정치질서, ‘협치의 플랫폼’이 필요합니다.
개헌 논의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87년 체제를 극복해야 할 구조적 전환기입니다.
역사가 바뀌고, 시대의 요구가 바뀌면 헌법을 그에 맞게
바꾸어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국가적 과제와 비전이 구현되어 있는
새로운 헌법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개헌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20대 국회 출범 직후 개헌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들이 수렴되기를 기대합니다.
선거제도 또한 이대로는 안 됩니다.
현행 소선거구 제도는 다수의 사표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고질적인 지역구도를 깨기 어려운 심각한 단점이 있습니다.
국회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고
사회적 합의와 생산적 타협의 정치를 이루기 위해지역패권주의와 승자독식의 선거 제도를 혁파해야 합니다.
마침 정쟁이 아닌 협치가 필수적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20대 국회에서는 중대선거구제, 권역별비례대표제 등
근원적 선거제도 개혁을 이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이제 국회를 떠나지만,
낡은 정치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열어나가는 길에
작은 밀알이 되고자 합니다.
협치와 연대의 정치개혁, 국민중심의 정치혁신에 동의하는
우리 사회의 훌륭한 분들과 손을 잡고,
우리나라 정치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 수 있는
‘빅 텐트’를 함께 펼치겠습니다.
국회의장으로서 여야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이
초당적으로 국회를 운영해왔듯,
퇴임 후에도 정파를 넘어서는 중도세력의 ‘빅 텐트’를 펼쳐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되겠습니다.
더 이상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저는 국민들의 민의가 정치에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국민의 뜻이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정치개혁을 고민하려 합니다.
국민과 정치와의 거리를 최대한 좁힐 수 있도록
정당 시스템의 창조적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를 통해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넘어
통합과 화합의 새 시대로 나아가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이것이 20년간 국가의 녹을 받아온 제가
국가와 국민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정치가 싫고 국회가 밉다고 외면하지 마시기를
국민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정치는 사회적 합의의 기초이고,
국회는 우리 사회를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법을 만들고 고칩니다.
정치와 국회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 사회도 바뀌기 힘듭니다.
우리 정치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국회가 제 할일 제대로 하는지 지켜봐주십시오.
저 정의화도 제 이름자대로
늘 ‘옳은 길’을 걷고, 항상 ‘화합하는 길’을 가며
국민 여러분 곁에 있겠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