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칼럼] 이세돌 9단과 박근혜 대통령

입력 2016-04-2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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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다섯 차례 바둑 대국은 3월 15일 마무리됐다. 40여 일이 지난 지금 많은 것이 변했다.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 인간의 미래에 대한 걱정, 기계 대 인간, 집단지성의 놀라움, 이런 것들이 시대의 화두가 되면서 다양하고 무성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대국 당사자였던 이 9단은 어떨까? 알파고와의 대국 이후 이 9단은 사람과의 대국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대국 수가 그리 많지 않지만 이 9단은 24일까지 국내·국제 대회에서 4연승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4년마다 열리는 ‘바둑올림픽’ 응씨배 세계대회에서는 4강에 진출해 한국 1위 박정환 9단과의 준결승을 앞두고 있다. 승률이 좋지 않은 커제(柯潔) 9단을 박 9단이 물리쳐주었으니 이 9단으로서는 우승을 바라볼 만도 하다.

이세돌은 왜 더 강해졌을까? 바둑이 늘었다기보다는 승부 호흡이 달라졌거나 이기는 법을 새삼 깨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 9단이 강해진 것은 철저히 패했기 때문이다. 그는 알파고와의 다섯 차례 대국에서 한 판밖에 이기지 못했다. 상금이 걸린 세 판을 내리 진 다음 한 판을 건졌다.

이 승부에서 그가 얻은 것은 자신의 바둑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며 알파고식 발상의 전환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강동윤 9단과의 응씨배 8강전에서 이 9단은 알파고식 발상의 한 수를 두었다고 기사들이 평가했다. 알파고로부터 배운 것이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 이야기를 해보자. 박 대통령은 4·13총선에서 철저하게 패했다. ‘알파박’이라는 말을 들어가며 새누리당 공천에 보이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기대와 달리 완패했다. 이세돌 9단과 같은 이른바 ‘신의 한 수’ 78수도 없었다.

국민들은 알파고와 같은 안목과 분석력으로 새누리당의 오만과 박근혜 정부의 무능을 심판하면서 3당체제를 마련해주었고, 놀라울 만큼 차원 높은 집단지성의 힘으로 새로운 정치, 협치(協治)를 통한 국정 운영을 명령했다.

철저히 패한 사람은 편하다. 더 이상 당할 게 없기 때문이다. 흠씬 두들겨 맞은 사람은 몸을 새로 만들 수 있다. 그런 사람의 행동은 부당하거나 정직하지 않은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닌 한 많은 사람들의 동정과 이해를 얻기 쉽다. 박 대통령은 지금 그렇게 아주 좋은 환경에 처해 있다. 무엇을 하든 종전과 같은 외골수나 불통이 아니라면 국민들의 지지와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상황이다.

선거 결과에 대해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으로 남 이야기하듯 한마디했던 박 대통령이 오늘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과 오찬을 한다. 3년여 만이다. 이것이 앞으로 새로운 소통의 계기가 될 수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의 그런 오찬에 세 번 참석해본 내 경험으로는 한계가 보인다. 어느 대통령이든 대통령은 언론계의 충고나 조언을 기대한다며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만 그 자리에서 기탄없이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이 박 대통령은 부담 없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결국은 또 대통령이 거의 일방적으로 많은 말을 하게 된다. 언론과의 만남이 그럴 정도이니 다른 자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박 대통령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승부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진 바둑은 진 바둑이다. 왜 졌는지 계속 복기하면서 기력을 향상시켜야 마땅하다. 그리고 스스로 말을 많이 하기보다 많이 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말을 잘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가려 뽑아 기용해야 한다. 여든 야든 진영을 가리지 말고 필요한 사람을 불러서 쓰는 게 좋다. 더 이상 밑지고 더 이상 질 게 없는 대통령이니 운신하기가 얼마나 편한가. 모든 일이 대통령 한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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