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백원구 증권감독원장 당시 구체화 되지 못한 통합 금감원 설립은 후임 박청부 원장 시기에 이뤄졌다. 통합 과정에서 증권감독원은 물론 각 감독기관의 우려와 반발이 끊이지 않았다.
애초 기관 통합 논의는 1995년 한국은행 독립 논쟁 과정에서 처음 대두했지만 한차례 무산된 후 1997년 2월 다시 추진됐다. 정부는 재정경제원과 은행·증권·보험감독원 등에 분산된 금융감독기능을 통합하는 내용의 금융감독체계 개편안을 내놨고 1998년 말부터 본격 통합 수순을 밟았다.
증감원 내부에서는 통합 금감원 이후 증권 감독의 전문성과 특수성 훼손에 대한 위기감이 컸다. 당시 금융개혁위원회에서 제시한 금융감독제도 개선안이 금융산업이 당면한 문제와 취약점에 대한 고민보다는 감독권한의 배분 문제에 치중돼 있기 때문이었다.
통합 이후 금감원 체제에서 조직 축소와 인력감축에 대한 우려도 작용했다. 금융권 밖에서는 ‘밥그릇 싸움’이라는 지적도 나왔지만 당시 증감원 노조는 통합 반대 궐기대회를 열고 밤샘 농성을 벌였다.
당시 노조 관계자는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수 없다”며 “정부의 통합안이 증권감독의 전문성을 퇴색시키고 관치금융을 더욱 강화하는 조치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비판했다.
노조의 우려는 일부 현실화됐다. 금감원 조직 구성 초안은 26국 4실 7대팀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여기에서 증권사와 불공정거래 검사, 기업 재무정책 및 공시심사 등 증권감독 분야의 핵심 기능이 크게 위축된 것이다. 또한 통합 금감원의 인원도 기존 4개 감독원 인력에서 100여명 줄어든 규모로 결정돼 상당수 직원이 옷을 벗어야 했다.
통합 후 시너지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 한동안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1999년 초 신동방그룹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신청 전 유상증자를 시행해 문제가 됐으나 금감원에서는 이를 사전에 전혀 인지하지 못해 질타받았다.
신동방은 그해 1월에 유상증자를 위한 주식발행신고서를 금감원에 제출했고 3월 증자를 완료했다. 회사 측은 일반인의 대금청약 후 워크아웃을 결정하면서 투자자들에게 손실을 떠넘겼다. 주채권은행인 한빛은행이 2월부터 신동방 측과 워크아웃 신청 여부를 논의하고 있었음에도 금감원 내에서 은행감독국과 증권감독국의 공조가 이뤄지지 않아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 같은 감독의 사각지대는 금감원 통합 17년째인 현재에도 종종 되풀이되는 이슈다. 증권감독원 출신의 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보다 시스템이 개선되고 조직이 안정화되면서 부서 간 공조는 전보다 원활히 이뤄지고 있다”며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권역별 성과를 경쟁하는 체제에서 사각지대나 무한경쟁지대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