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화’는 그동안 사극에서 다루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변호사 제도인 ‘외지부(外知部)’를 소재로 한 것입니다. 외지부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던 훌륭한 인권제도로, ‘옥중화’는 외지부로 활약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극입니다. 50편의 대장정이 시작됐습니다. 제가 연출한 또 하나의 사극이 시청자와 만나게 되는 거지요.
저의 길이 있습니다. 바로 사극이라는 길입니다. 사극에 내 젊은 날을 바쳐왔고 앞으로도 남은 생을 바칠 겁니다. 저는 사극 덕분에 영광을 얻었고, 숱한 날 고통을 겪었고, 뜻하지 않은 기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가출 청소년이 ‘허준’을 보고 앞으로 똑바로 살겠다는 편지를 보냈을 때 감격했고 ‘대장금’이 세계인의 뇌리에 한국 드라마의 위상을 심어줬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만세삼창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1970년 MBC 드라마 PD가 된 뒤 지난 46년 동안 1200편의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이 중 900편이 사극이었으니 저와 사극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 친구 따라 방송사 PD 시험을 보고 준비도 없이 덜컥 드라마 PD가 됐지요.
‘113 수사본부’로 연출 인생을 시작해 ‘제3 교실’ 등으로 호평을 받았지만, 슬럼프에 빠져 예능 부서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지요. 예능국에서 만난 프로그램이 ‘역사의 인물’이었습니다. ‘역사의 인물’이라는 50분짜리 다큐멘터리가 수렁에 빠진 나를 건져줬고 오늘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역사의 인물’은 30분 다큐, 20분 드라마 형식이었는데 제가 투입돼 드라마 부분을 맡아 제작했습니다.
반응이 좋아 드라마국으로 복귀했습니다. ‘역사의 인물’은 매주 한 사람씩 역사의 인물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으로, 80명의 인물을 다뤘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역사 공부를 해 제 연출 인생을 바꾸게 됐습니다. ‘수사반장’ 등을 거쳐 1980년 ‘암행어사’를 시작으로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를 연출했지요. ‘조선왕조 500-설중매’ 같은 경우 50%의 시청률을 기록해 사극 연출가로 인정을 받았지요.
그러나 제작국장으로 재직하다 MBC 드라마가 저조해 1년도 안 돼 책임을 지고 물러났습니다. 또 한 번의 연출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는데, 그 위기를 극복하게 해준 것도 바로 사극이었습니다. 시청률 60%가 넘은 ‘허준’이었습니다. 제 이름을 세상에 알린 ‘허준’을 연출하고 이어서 ‘상도’ ‘대장금’ ‘서동요’ ‘이산’ ‘동이’ ‘마의’ 등 사극만을 연출했습니다.
한국에서 사극을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입니다. 고증난, 예산난, 제작난 등 3난(三難)을 이겨내야만 사극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사극을 하는 것은 사극은 역사 속 인물과 사건에 생명을 불어넣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교훈과 재미,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창조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근래 들어 사극은 역사 교과서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세계인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 인물을 알리는 창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극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전할 용기를 주고 좌절하는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등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대장금’ ‘동이’ 등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사극이 오늘의 여성들에게 도전정신을 심어줬다는 평가를 받았듯 사극을 통해 남성보다 열악한 위치에 있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합니다. 사극을 통해 아름답고 의미 있는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정말 좋습니다.
제가 연출한 사극을 보고 요리사로서 살아가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여성, ‘사람을 남기는 것이 최대의 이윤’을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사업가를 만날 수 있었지요. 또한, ‘대장금’을 본 루마니아 여고생이 한국 유학을 결심하고, ‘동이’를 시청한 일본 주부는 한국의 의상과 건축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는 편지를 받았지요. 이럴 때면 연출가로서의 길을 잘 걸어왔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요.
그래서 사극을 만들 때 제가 지키는 두 가지 확고한 원칙이 있습니다. 폭력을 미화하는 사극을 절대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첫째이고 역사를 왜곡하지 않겠다는 것이 둘째입니다. 물론 사극을 하면서 역사적 사실과 드라마적 흥미 추구에서 오는 차이, 졸속 제작으로 인한 표현 부족, 그리고 긴 기간의 작업에서 오는 매너리즘과 평안을 추구하는 육체적 욕구에 굴복하는 안이함과 길고도 긴 싸움을 해왔지요.
‘옥중화’ 제작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가슴 속에 다짐을 다시 한 번 합니다. “나는 오늘도 사극이라는 꿈을 꾸지만, 그것은 나만의 꿈이 아니다. 우리나라 모든 사람, 특히 앞으로 살아갈 세대의 꿈을 대신 꾸고 있다. 작으나마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사극을 연출하면서 할 일은 오직 그것이다”라고요. 이제 다시 이 땅에서 살다간 사람들의 뜨거운 삶을, 아름다운 사랑을, 높은 자긍심을 ‘옥중화’를 통해 표출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