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의 작품 어디에서도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조건 없는 낙관론을 펴거나 인간에 의한 자연의 정복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소설 ‘신비의 섬’만 봐도 그렇다. 난파자들은 섬의 문명화, 혹은 식민지화에 도전했으나 이 시도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이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섬의 폭발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박아르마 건양대 불문학과 교수의 쥘 베른(1828.2.8~1905.3.24)에 대한 평가다. 그의 지적과 마찬가지로 베른은 비행기나 잠수함, 우주선이 만들어지기 전 단지 상상만으로 이런 대단한 물건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썼지만, 그것에 대한 조건 없는 맹신도 보내지 않았다.
프랑스 낭트에서 태어난 베른은 애초 법률을 공부했으나 알렉상드르 뒤마 등 문호들과의 만남으로 글쓰기를 꿈꾸는 청년 문학도가 됐다. 그는 글쓰기에 대한 강한 열망 속에 데뷔작 ‘부서진 지푸라기’라는 희곡을 썼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863년 돈 안 되는 희곡을 접고 잡지 ‘교육과 여가’에 ‘5주간의 풍선여행’이라는 낭만적 모험소설을 연재하면서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1858년 초창기 사진작가로 유명한 가스파르 나다르가 기구를 타고 최초의 항공사진 촬영에 성공한 것이 모티브가 됐다. 이 작품의 성공에 고무된 그는 ‘지저 탐험’(1864) ‘달세계 여행’(1865) ‘해저 2만리’(1870) ‘신비의 섬’(1874) 등 비슷한 모험물을 내놨다. 그리고 대부분 ‘5주간의 풍선여행’ 못지않은 성공을 거뒀다.
그의 모험주의 소설에 대한 탐닉은 결국 1873년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낳았다. 프랑스 잡지 ‘르탕’에 연재될 때부터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이 작품은 지금도 그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