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돌아야 맛이다. 우리 몸속에 피가 잘 돌아야 하듯 경제가 잘 운용되려면 돈이 잘 흘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돈의 흐름이 꽉 막혀 있다. 통화유통속도가 19년여만에 최저치를 유지하고 있어서다. 소위 ‘돈맥경화’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돈맥경화를 보는 시선이다. 정책당국인 한국은행은 5만원권 발행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반면 경제전문가들은 저물가, 저금리, 저성장을 주된 원인으로 꼽는다. 경제를 보는 시각이 다르니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도 찾기 어렵게 됐다.
통화승수란 본원통화 한 단위가 몇배의 통화를 창출했는가를 나타내주는 지표다. 통화총량(광의통화, M2)을 본원통화로 나눠 산출한다. M2는 현금통화와 요구불예금, 2년미만 정기예·적금 등 사실상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돈이다. 본원통화는 한국은행이 발행한 화폐발행액과 예금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한 지급준비예치금(지준금)의 합계다.
한은은 이같은 돈맥경화에 대해 즉답을 피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돈맥경화라는 용어를 사용치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해 평가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5만원권 발행 vs 저금리·경기위축= 최근 통화승수가 줄고 있는 것은 분자인 M2 증가율보다 분모인 본원통화 증가세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한은이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은 없다. 다만 한은은 본원통화 중 화폐발행 잔액에, 전문가들은 지급준비금에 무게중심을 두는 분위기다.
우선 작년 12월말 현재 화폐발행잔액은 86조7571억원 기록, 두달만에 86조원대를 회복했다. 지난해 9월에는 86조7608억원까지 늘며 1960년 1월 통계집계 이래 최대치를 경신한 바 있다.
한은은 이같은 증가세 원인을 5만원권 발행에서 찾고 있다. 2014년 9월30일 한은이 국회에 제출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 따르면 화폐발행액 증가율은 5만원권 발행 이전 5.2%(2005년 1월~2009년 6월중 평균)에서 이후 16.0%(2009년 7월~2014년 6월중 평균)로 상승했다. 실제 작년 12월 현재 5만원권 화폐발행잔액은 64조3236억원을 기록 중이다. 총 화폐발행잔액 중 5만원권이 차지하는 비율은 74.25%에 달했다.
반면 전문가들은 2013년 이후 지속되고 있는 저금리 기조와 경기불안 등에 따라 민간의 현금보유 성향이 증대한 때문으로 풀이했다. 즉, 시중자금이 단기성 상품에 몰리는데다 비은행권 실적배당형상품에서 은행예금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한은도 이 영향에 M2내 지준금 적립대상 이외의 상품 비중이 2009년 7월 52.1%에서 2011년 12월 49.8%로 하락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실제 요구불예금의 경우 작년 11월 현재 173조5742억원(평잔, 원계열기준)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전년동기대비 증가율도 28.5%로 작년 7월 이후 5개월 연속 20%대 후반 증가세를 이어갔다. 요구불예금은 지준율 7%가 적용된다. 시중은행이 한은에 예치하는 지준금 급증의 원인이다. 한은 지준율은 장기주택마련저축 등 장기성예금의 경우 0%를, 정기예금 등 중장기성예금의 경우 2%를 적용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작년 2월 ‘통화승수 하락의 원인과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가계의 평균소비성향이 2007년 76.6%에서 2010년 77.3%까지 증가하다 2013년 73.4%, 2014년 72.9%까지 하락했다고 분석했다. 기업의 설비투자 증가율도 추세적으로 하락하고 있다고 봤다. 상장기업 현금유보율 역시 금융위기 이전인 2008년 712.9%에서 2013년 1023.5%, 2014년 상반기말 1092.9%까지 빠르게 증가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임진 한국금융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민간대출이 적으니 통화창출이 안되는 것이다. 본원통화 증가분 만큼 통화승수가 감소하는 것”이라며 “경기부진을 반영한 것이다. 경기가 좋아지고 투자나 가계소비가 늘어날 때 통화승수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