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어는 사회의 감수성, 시대정신, 민심, 여론 등을 읽을 수 있는 기제이자 사람들의 잠재된 실망, 분노 등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다. 인터넷, SNS 발전으로 유행어 진원지가 매스미디어 위주에서 일반인으로 확장되는 상황에서는 유행어는 시대와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상황을 드러내는 강력한 기표(記表·signifier) 역할을 한다. 그 기표로 의미되거나 표시되는 기의(記意·signified)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진화를 조금이라도 꾀할 수 있으니.
강신항 전 성균관대교수는 저서‘유행어에 반영된 세태’등을 통해 “기발한 표현, 쌓였던 민심의 표출, 울화의 표현,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을 단적으로 토로하고 싶은 욕구, 세태에 대해 짤막한 한마디로 날카롭게 찌르려는 욕구, 이런 것들이 유행어를 사용하게 되는 동기”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2015년 올 한해 대한민국을 강타한 유행어는 어떤 것이 있을까. 당신은 올해 유행어 중 어떤 것이 떠오르는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장 강력한 유행어로 떠오른 것이‘헬조선’과 ‘금수저’다. 취업난과 경기침체로 N포 세대로 전락한 청년층의 절망, 분노가 지옥 같은 한국이라는 ‘헬조선’‘지옥불반도’라는 유행어로 표출됐다.‘금수저’라는 유행어 역시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정신적 귀족이 되고 싶었지만, 생존을 결정하는 건 전두엽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었다.”지난 18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대 학생 A씨(20)가 유서에서도 적시했듯 우리 사회에선 노력과 실력이 성공을 가져다주는 능력주의(Meritocracy) 신화가 설 자리를 잃고 대신 권력과 세습자본이 성공 보증수표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금수저’라는 유행어가 등장했다.
유행어의 전통적 양산지인 영화, 방송, 음악 등 대중문화에서 유래된 것 역시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1341만 관객 동원으로 올해 흥행 1위에 오른 영화‘베테랑’에서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 분)가 420만 원을 받기 위해 1인 시위하는 노동자를 향해 던진 “어이가 없네”라는 대사가 유행어가 됐다. 재벌 등 슈퍼 갑의 을을 향한 부당한 갑질에 대한 분노가‘어이가 없네’를 유행어로 유포시킨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소개돼 패러디물이 쏟아지면서 눈길 끈 유행어가 이애란의 노래‘백 세 인생’중 ‘~한다고 전해라’다. “안돼”라는 말을 할 수 없던 을 처지인 사람들이 이 유행어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다.
비판과 질타를 받았던 정치권과 박근혜 대통령에 관련된 유행어도 2015년을 읽는 단초다. 메르스 사태 등에서 보인 정부와 대통령의 논리 없는 주장과 대책,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행태를 비꼰 ‘아몰랑’, 대통령 말을 잘 받아 적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적자생존’이 인구에 회자했다. 이 유행어에는 대통령과 정치권의 소통 부재와 무능력에 대한 질타가 담겨 있다.
한해를 정리하는 대학 교수들이 고른 사자성어 역시 어김없이 2015년의 유행어로 떠올랐다.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무도(無道)하다는‘혼용무도(昏庸無道)’다. “올해 초에는 메르스 사태로 민심이 흉흉했지만, 정부는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무능함을 보여줬다. 중반에는 청와대가 여당 원내대표에 대해 사퇴 압력을 넣어 삼권분립과 의회주의 원칙이 크게 훼손됐다. 후반에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으로 국력 낭비가 초래됐다”는 이승환 고려대 철학과 교수의‘혼용무도’추천 이유가 유행어가 된 원인이다.
2016년 병신년에는 또 어떤 유행어가 등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