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정에서 동문시장까지 이곳저곳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먹어대던 낡은 자장면 집, 술 취한 내가 기대어 토악질 해대던 옛 술집의 담벼락, 그리고 중간고사 마지막 날이면 몰래 숨어 들어간 에로영화 동시상영관. 동문시장 명패 앞에 서자 극장 안에 웅크리고 있던 그 시절의 감각들이 되살아나 나를 다시 덮쳤다. 문득 이 건물이 오랜 시간 나를 기다렸다가, 그간 품고 있던 기쁨을 아낌없이 내게 베푼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증여’(贈與)와도 같다.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씨족사회에서 주로 일어나는 ‘증여’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를 매개로 한 ‘상품교환’을 비교한다. 말 그대로 상품교환이 쌍방이 주고받는 것이라면, 증여는 일방이 주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형태만 다르지, 교환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상품교환은 화폐를 매개로 한 상품 간 교환이다. 그것은 서로 거래하고 나면 바로 끝나는 좀 야박한 관계다. 하지만 증여는 다르다. 부모와 자식 간의 교환이 그 예다. 부모는 아이가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증여한다. 아이는 바로 답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이는 커갈수록 부채감이 커진다. 물론 자라서 부모에게 그것을 갚기도 하겠지만, 그 큰 은혜를 다 갚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답례는 자기 아이에게 하거나, 공동체 내 다른 누군가에게 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미지의 타자와 교환하는 것이다. 결국 증여와 답례는 공동체적으로 일어난다. 씨족사회에서는 이 증여가 결국 의무를 이행하는 일과 같다. 또 증여를 할수록 의무를 덜어 지위도 높아지고, 마음도 평화로워진다고 한다. 가진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지위가 높아지는 사회라니!
극장 앞에서 나는, 옛 건물들이 사람들의 기쁨을 품고 있다가 내게 증여한다고 느꼈다. 누군가 건물을 통해 나에게 기쁨을 증여하고 의무를 다했을지도 모른다. 시내를 거닐며 옛 건물들을 보고 내가 기뻤다면,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도 기쁨을 누군가에게 이어서 증여해야 할 의무감이 생긴다. 여기에 이르면 증여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뭔가를 우리에게 증여한다. 우리는 이런 감각들을 증여받고서야 삶을 삶답게 살아간다.
저녁이 되자 약속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안부를 전하고, 서로 흥을 돋우기 바쁘다. 이미 은퇴하신 선생님도 즐거우신지, 옛 노래를 한껏 흥얼거리신다. 가라타니 고진은 씨족사회의 교환양식인 증여-답례를 “고차원적으로 회복하자”고 말한다. 이런 친구들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세상 야박한 걸 탓하지 말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먼저 증여의 마음을 연습해야하지 않을까. 그게 세상을 바꾸는 출발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