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무척 어울리는 목소리의 임태경 콘서트라 더 감미로웠지만, 자연 풍경 속에 놓인 관객 한 명, 한 명이 다 예술적인 오브제였다. 관객들은 콘서트를 즐기는 것 이상의 정서적인 감흥을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뉴욕 첼시 지역의 폐허가 된 공장지대는 한낮에도 을씨년스럽다. 그런데 그곳의 폐장한 클럽, 호텔 등은 밤이 되면 그 공간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 독특한 공연으로 불을 밝힌다. 그곳의 낡은 맥키트릭호텔(McKittrick Hotel)에서 충격적으로 본 장르 불명의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는 생애에 꼽는 공연이었다. 5층 호텔 건물 속 100개가 넘는 방은 200명 이상의 아티스트 자원 봉사로 4개월 이상 꾸며져 침실, 욕실, 병원, 정원, 연회장, 공중전화 부스, 술집, 밀실, 감옥, 공사장, 실험실 등으로 섬세하게 무대로 변신했다. 이곳에서 셰익스피어의 멕베스 속 인물들은 비틀린 캐릭터로 재탄생해 관객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관객들은 모두 흰 가면을 써야 한다. 그럼으로써 극중 코러스가 되기도 하고 관찰자이자 방관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퍼즐 게임하듯 호텔의 통로와 미로를 종횡 무진하는 체력 소모를 해야 공연을 최대한 체험할 수 있다. 관객들이 극의 구성 요소로 극의 동적 에너지를 담당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공연을 퍼포먼스, 무용극, 환경연극, 인터랙티브 연극이라고 평가하고 뉴욕타임스는 심지어 양식화하고 환경적 ‘매시업(mash-up)’이라고까지 부른다. 장르 파괴 이상의 새로운 장르 창출인 셈이다.
오래전 첼시의 문 닫은 클럽에서 장기 공연됐던 ‘더 동키 쇼(The Donkey Show)’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 원작답게 2층 구조의 클럽 곳곳을 뛰어 다니는 배우들을 서서 쫓아다니며 관람했다. 손에는 칵테일 한 잔을 들고 말이다.
또 세계적 팝스타 스팅은 자신의 집에서 정기적인 하우스 콘서트를 연다. 스팅뿐만 아니라 세계적 아티스트를 거실에서 차 한잔을 하듯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아이슬란드를 상징하는 록 밴드 시규어 로스는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가 라디오헤드에 많은 영향을 준 밴드라 하고 비요크가 이 밴드를 주신 신께 감사한다라고 극찬했다. 아이슬란드어, 영어, 그리고 그들이 만든 희망어로 노래하는데 음악으로 그들이 전하는 아이슬란드 대자연의 소리와 풍경은 언어를 뛰어넘는 깊은 울림이 있다. 그들의 음악이 그렇게 특별한 까닭에는 그들이 아이슬란드 계곡, 들판 어디든지 자연 한가운데서 자연의 일부로 야외 콘서트를 벌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박창수 대표의 ‘더 하우스 콘서트’가 있다. 마룻바닥을 타고 울리는 진동까지 느껴지는 진정한 음악 감상에 뜻을 두고 연희동 자택을 개조해 시작한 이 작은 콘서트는 벌써 10년 이상 세계적 음악가들의 섬세한 공연장이 되고 있다.
예로부터 세계적 음악가들의 불멸의 작품을 잉태해 줬던 살롱 문화, 한국의 전통 연희를 지탱해 오던 마당의 멍석 문화는 또 다른 공연 창조의 장이었다. 몇 년 전 슬로바키아 옛 시가지를 산책하다가 발견한 골목 어귀에 놓인 피아노 한 대와 연주하던 소녀, 프라하 거리의 줄 인형 연주가 예술이던 노인과 그 곁에서 춤추던 관광객 부부, 음악의 날 온갖 연주와 노래로 상제리제 거리 전체를 거대한 연주회장으로 만들던 일반 시민들은 내 기억의 사진첩에 영원히 자유로운 기쁨으로 각인된 풍경들이다.
최근 프랑스 테러 현장을 감싸안았던 피아노 연주는 예술이 인간의 일상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역할을 가장 감동적으로 반영했다. 그래서 요즘 공연장에 들어서면 폐소공포증을 앓듯 자주 답답해진다. 그리고 광장, 마당, 공원, 옥상, 골목만 보면 신명나는 축제 장면들이 자꾸 떠오른다. 공연장이 생업장인 사람이 버스킹도 허가를 받아야 하는 한국 땅에서 몹쓸 병에 걸린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일상 속에서 함께 뛰노는 광장 문화를 위해 에너지를 쏟아 스스로 이 몹쓸 병을 치유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