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존재는 역사 기록에서 오랫동안 가시화되지 못했다. 여성의 삶은 공식적인 역사 기록보다 생애사 구술에서 더욱 생생한 역사로 드러난다. 다음은 대구의 1945년생 여성 두 사람의 살아온 이야기이다. 이정자(가명)씨는 1945년 10월에 대구에서 태어났다. 박영자(가명)씨는 1945년 7월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고, 결혼 후인 1974년부터 대구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정자씨는 1남 3녀의 맏딸이고, 박영자씨는 2남 2녀의 맏딸이다.
◇어린시절=이정자씨는 1945년 10월에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정자씨의 부모님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사셨는데, 해방이 되면서 조국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가난한 조국에서 생활 할 수 있는 기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우선 장사를 했다. 아버지는 구멍가게를 했는데 가족들의 생계를 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어머니가 ‘고구마 같은 것 삶아 가지고 역전에서 팔며’살림을 보탰다.
박영자씨의 부모님은 충북 제천에서 대대로 논농사를 지었고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근무했다. 박영자씨의 어린시절은 상대적으로 풍족한 편이었으나 생계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서 동생들을 돌보는 것은 오롯이 맏딸의 몫이었다. 두 사람 모두 큰 딸로서 동생들 키우는 것은 ‘제 몫’이었다고 인식했다.
“엄마가 공장에 다녔어요. 동생이 어리니까, 동생을 업고 엄마한테 젖을 먹이러 가요. 엄마가 젖을 주잖아, 그러면 다시 와요. 그런 식으로 살았어요.”(이정자, 대구)
이들이 6살 되던 해인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어렸을 때이므로 전쟁에 대한 기억은 그리 뚜렷하지 않았다. 어렴풋이 피난갔다가 돌아왔던 기억, 총소리가 나면 대청마루 밑으로 숨었던 기억, 총알 구멍, 빨간 띠를 두른 이북 사람을 본 기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기억 속 어린시절은 마냥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은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한 시절이 행복했다고 추억했다.
◇교육= 이정자씨의 어머니는 부지런했고 교육열이 많은 분이었다. 맏딸인 이정자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세 동생은 대학교를 졸업했다. 어머니는 “밥은 굶어도 교육은 시켜야 한다”라며 남녀의 구분없이 4남매를 교육시켰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만 해도 월사금 못 내는 애들이 많았어요. 그러면 선생님이 ‘엄마가 벌어서도 이렇게 빨리 내는 이정자를 함 봐라.’선생님이 그렇게 이야기 하실 정도로 빨리 내고. 그때 엄마가 코트를 팔아 가지고, 저당해 가지고 등록금을 주더라고. 그만큼 엄마가 열의가 있었어요.”(이정자, 대구) 어머니의 교육열은 이정자씨에게도 이어졌다. “엄마를 닮아가지고 애들 공부를 많이 시켰으니까. 애들 똑똑하게 만들어야 될 거 아닌가요.”
박영자씨의 경우 남자형제는 고등학교까지, 박영자씨와 여동생은 중학교까지 다녔다. 박영자씨는“학교에는 큰 욕심이 없었어. 지금까지 살림만 하고 살은 기라”라고 했다.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은 엘리트였으나 사회생활, 직장생활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여자가 돈을 벌면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이정자씨는 교대를 가서 선생님이 되거나 시험을 쳐서 5급공무원이 되었으면 좋았으리라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교육을 받은 것이 사회진출에 유리하다는 점을 인식했던 것이다. 박영자씨 역시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같은 (엄마)또래들이 많았고, 애들도 많았고 하니까 과외를 조금씩 시켰어요. 다른 사람은 안 시켜도 우리는 몇 명이 어울려서 보내서 과외를 시켰어요.”
이정자씨는 결혼을 한 후, 결혼 전에 소개받았던 내용이 많이 다르다는 점을 깨달았다. “응. 고생 좀 했어. 남편이 사업에 실패했지. 고생 많이 했어. 무지했어요.(웃음) 고생도 안 해보고 크다가 고생 많이 해가지고 사네 안사네 몇 번 했지만, 애들 때문에 살았지. 애들 고생해서, 저래 애들을 버리고 가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살았지.”
이정자씨의 남편은 사업에 실패한 이후, 별다른 생계활동을 하지 않았다. 생계를 위한 벌이와 남편의 병수발, 그리고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시키는 일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당시 여자가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은 많지 않았다. “장사가 뭐 크게 한 건 아니고, 손수레 장사부터 다 해봤어요. 식당 종업원까지.” 이정자씨가 본격적으로 가정 경제를 책임지던 시기는 70년대 후반이었다. 이 때부터 정부는 국제관광진흥과 외화획득을 목적으로 관광분야를 경제개발계획에 포함시켜 국가 주요 전략사업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직접 남편이 허락을 해줘야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거 아이가. 그래 영감한테, 내 일어 가이드 가련다 카면서. 3천원 속성반 석달 만에 된다카더라고 학원에서. 그러니까 영감이 절대로 안 된대. 뭐 술집여자보다 더 더럽고(웃음) 무엇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그래 가지고 못했어요.”
박영자씨도 “우리 시절에는 여자가 무조건 복종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남편은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지”라고 말했다.
박영자씨는 아이들을 한창 키우던 때를 가장 활기차고 분주했던 시기로 꼽았다. “쓰레기차가 아침에 댕기면 새마을노래 막 부르고, 도로, 하천 부지 막 정리”하던 시기로 당시를 기억했다. “그 때 대구에 진짜 초가집도 많았고, 그런 거 다 지붕 개량하고, 하천부지 같은 거 정리하고 좋았지”라고 기억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부녀회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공무원 부인은 그런 거 하면 절대 안된다고 해서 저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었어요”라고 했다.
◇노년생활= 이정자씨와 박영자씨 모두 종교생활을 하면서 복지관에서 공부하는 요즘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정자씨는 마음의 평안을 위해 스스로 천주교에 귀의하고 세례를 받았다. “내가 인자 우리 아저씨하고 사이가 안 좋으니까 시집 식구들을 미워하게 되더라구. 그래가지고 이 죄를 없애려면 내가 종교를…그래서 가게 됐던 거야. 그러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구. 미워하지도 않게 되고, 스스로.”(이정자, 대구)
“누군가 그라대. 인생에서 제일 좋은 때가 칠십에서 칠십오세라고 하더라구. 여자들이 남편 죽고 자식들 출가시키고, 그리고 이제 내 인생 즐기는 시간. 이래서 제일 여자들이 황혼기라는데 진짜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박영자, 대구) 이정자씨 역시 “지금은 아주 행복해요. 칠십 평생 살면서 나도 이런 날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이처럼 동시대 동일한 지역에서 살았던 여성들의 삶은 서로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에 대한 교육열, 남편에게 순종적인 결혼관 등의 접점을 찾을 수 있었다. 1945년 해방둥이 여성의 경험은 한국 근현대사의 전쟁과 정책, 사회ㆍ경제적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