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분들을 존경하고 그분들의 식견과 경륜을 존중해야 한다. 이른바 존년상치(尊年尙齒)다. 중국 당나라 초기의 명신 영호덕분(令狐德棻·583~666) 등이 지은 주서(周書) 무제상(武帝上)편이 출처다.[尊年尙齒 列代弘規 序舊酬勞 哲王明范] 존노상치(尊老尙齒)로도 알려져 있다.
전남 담양 출신의 농부 시인 고재종의 ‘한바탕 잘 끓인 추어탕으로’라는 작품에 흥겨운 존노상치 풍경이 나온다. 전체 5련 중 제3련은 이렇다. ‘그 벌건, 그 걸쭉한, 그 땀 벅벅 나는, 그 입에 쩍쩍 붙는 추어탕으로 상치(尙齒)마당이 열렸는데, 세상에, 원 세상에, 그 허리가 평생 엎드렸던 논두렁으로 휜 샛터집 영감도, 그 무릎이 자갈밭에 삽날 부딪는 소리를 내는 대추나무집 할매도, 그 눈빛이 한번 빠지면 도리 없던 수렁 논빛을 띤 영대씨와, 그 기침이 마르고 마른 논에 먼지같이 밭은 보성댁도 내남없이, 한 그릇 두 양푼씩을 거침없이 비워 내니’
조선시대에는 나이 많은 임금이나 현직에 있는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이 모여서 놀도록 기로소(耆老所)를 운영했다. 60을 기(耆), 70을 노(老)라 한다. 또 국왕이나 왕비 대비 대왕대비 등이 60 또는 70이 됐을 때, 60 또는 70세 이상자만을 대상으로 기로과(耆老科) 또는 기로정시(耆老庭試)라는 과거도 실시했다. 대표적인 존노상치 제도다.
최초의 기로과는 영조 32년이던 1756년 대비 인원왕후의 70세 때 실시됐다. 53년간 재위하면서 83세까지 살았던 영조는 기로과를 자주 열었다. 나이 70, 즉위 40년이 된 1763년에는 대증광시(大增廣試)에 이어 70세 이상을 대상으로 기로과도 열었다. 그 뒤엔 별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