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지상의 방 한 칸

입력 2015-10-01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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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근으로 아프다/…(중략)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밖에는 바람소리 사정없고/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잠이 오지 않는다.” 셋방살이의 설움이 짙게 묻어 있는 김사인의 시 ‘지상의 방 한 칸’이다.

“…한 번 갔던 데를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뒤졌고, 복덕방 사람들은 우리만 보면 ‘아, 또 왔군’ 하는 표정이었다.” 박영한의 단편소설 ‘지상의 방 한 칸’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사글셋방을 전전했던 작가다. 그래서일까. 박영한의 소설 ‘우묵배미의 사랑’ ‘왕룽일가’ 등에도 가난한 서민들의 고단한 삶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같은 제목의 시와 소설이 나온 1980년대 ‘지상의 방 한 칸’은 집 없는 서민에게는 그야말로 꿈이었다. 아이가 둘 이상인 경우 골목 어귀 세탁소나 담배 가게에 아이들을 맡겨 두고 방을 얻으러 가는 부모들도 많았다. 힘들게 문간방이나마 얻어 들어가 살아도 주인집 눈치를 보느라 셋방 부모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행여 주인집 아이의 심술로 애들끼리 싸움이라도 나는 날이면 눈물을 삼키며 제 자식을 야단 치고 돌아서서 울었다. 오죽하면 이 설움 저 설움 해도 배고픈 설움과 집 없는 설움이 가장 크다고 했을까.

사글세는 한자 ‘삭월세’(朔月貰)에서 유래했다. ‘삭월’은 음력 초하룻날 뜨는 달이다. 사글세는 집이나 방을 다달이 빌려 쓰는 것으로, 월세방과 같은 말이다. 어원에서 멀어진 형태이지만 굳어져 널리 쓰이는 것을 표준어로 삼는다는 표준어 규정 제5항에 따라 삭월세는 버려지고, 사글세만이 국어사전에 올랐다. 어원이 뚜렷하지만 언중 사이에 많이 쓰이는 사글세가 표준어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런데 사글세, 전세 등은 빌려 사는 것일까, 빌어 사는 것일까? ‘빌리다’는 ‘남의 물건이나 돈 따위를 나중에 돌려주거나 대가를 갚기로 하고 얼마 동안 쓰다’ ‘일정한 형식이나 이론, 또는 남의 말이나 글 따위를 취하여 따르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기회를 이용하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반면에 ‘빌다’는 ‘남의 물건을 공짜로 달라고 호소하여 얻다’와 ‘소원이나 용서를 바라며 간곡히 청하다’란 뜻으로만 쓰인다. 즉, 남의 물건을 돌려주기로 하고 쓴다면 빌리는 것이고, 밥 등 먹을거리를 거저 달라고 구걸하는 것은 빌어먹는 것이다. 따라서 집은 일정 기간 빌려 쓰다가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므로 빌려 산다고 해야 바르다.

또 많은 이들이 행사장 등에서 “이 자리를 빌어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잘못된 인사말이다. 대부분 ‘이 자리를 빌어…’를 굳어진 표현으로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자리를 빌어’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기회를 이용하다’의 뜻을 나타내는 ‘빌리다’를 써서 ‘이 자리를 빌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아직도 헷갈린다면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빌다’는 ‘빌어먹다’처럼 ‘구걸하다’의 의미이거나 ‘소원이나 용서를 빌다’처럼 간곡히 청하는 행위를 나타낼 때에만 사용한다.

이사철에다 결혼 시즌까지 겹치면서 전셋값이 고공행진하고 있다. ‘없는 집’ 자식들은 결혼은 꿈도 못 꾼단다. 폭등한 전셋값을 구하지 못해 외곽으로 밀려나는 전세난민에 이어 월세난민까지 등장했다. 정부는 각종 대책을 쏟아냈지만 약발은 ‘꽝’이다. 기가 막힌다. 2015년 가을 ‘지상의 방 한 칸’을 찾아 헤매는 이들의 한숨소리가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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