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위험이나 위기는 돌발적이며 광범위하다. 이제 정부는 이러한 위기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나아가 ‘인간 안보(human security)’ 개념을 적극 수용해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 안보’란 전통적인 안보에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까지 확장한 안보 개념이다. 즉 복지, 환경, 경제, 인권, 평화 등 인간의 삶의 질을 걱정하는 안보를 말한다. 전통적인 국가 안보는 외부의 위협이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영토 중심의 군사적 안보가 중심이다.
그러나 메르스 사태에서 확인했듯 국경을 넘나드는 전염성 질병도 국민의 안전을 실질적으로 위협한다. 국경을 넘나드는 질병에 대한 다각적인 사전 연구와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질병의 위협에 전 국민이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인간 안보 개념은 1994년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한 인간개발보고서에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것’을 안보 위협으로 규정하면서 정립되었다. 이미 영국, 러시아, 미국 등 각국은 인간 안보 개념을 수용해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안보정책을 확장하고 있다. 우리도 영토 중심의 국방 안보 관점에서 벗어나 국민의 안전한 삶을 위협하는 질병, 환경과 같은 비군사적 요인까지 포함한 안보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 그에 따른 체계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전통적인 영토 중심의 국방 안보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 메르스 사태에 대처하는 모습에서 우리 정부가 여전히 질병 관리 차원의 보건 정책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메르스 발발 초기에 병원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국민 스스로 SNS에 의존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메르스가 빠르게 퍼지면서 공포가 온 사회를 뒤덮는 데도, 범정부 차원의 체계적 대응은 조기에 구축되지 않았다.
정부는 메르스를 범국가적 차원의 대응이 필요한 안보 위협 요인으로 파악하기보다 시간이 지나면 완치될 감기와 같은 보건 문제로만 치부한 것이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는 이유는 영토에 사는 국민 개개인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우리의 안보 개념도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적극 확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메르스를 안보 위협 요인으로 상정하고, 범정부적으로 대처하려 해도 대통령 중심의 긴급 위기대응체계를 갖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바로 세종시 때문이다. 총리실을 비롯한 16개 중앙부처가 세종시로 이전해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은 130여km 이상 떨어져 있다. 대통령 중심의 위기 대처 시스템을 즉각 구축해 작동토록 하는 것은 사실상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말이다.
세계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가 다양해지고 있다. 다양화되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국가 안보 위협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신속한 대책 마련과 집행이 중요하다. 국가위기를 발생시키는 위협요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황이 급변한다. 그래서 위기대응 조직은 얼굴을 마주 보고 수시로 대책을 협의해 빠르게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같이 대통령과 행정부처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위기관리 체계에 치명적 약점을 갖게 된다. 국가 위기관리는 시간 싸움이기도 하다. 영국이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반경 3km 이내에 행정부처를 배치하고, 미국 또한 백악관을 중심으로 반경 3km 안에 의회와 행정부처가 자리하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번 메르스 사태가 세종시 문제를 다시 한 번 확인해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