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에 직면한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18일(현지시간) 상트 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3일간의 일정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이날 보도했다.
이날은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에서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이 성과를 내지 못해 오는 22일 긴급 EU 정상회의를 소집하기로 하는 등 국제사회엔 긴박한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프라스 총리가 러시아를 방문한 것은 국제 채권단과의 협상이 고비를 맞는 가운데서도 자신이 정상적으로 총리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자세를 대외에 과시할 목적이라고 WSJ는 해석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러시아 일정 중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회담할 예정이다. 치프라스 총리와 동행한 파나기오티스 라파자니스 에너지 장관은 19일 러시아의 알렉산더 노박 에너지장관과 러시아 천연가스를 터키를 통해 유럽으로 수송하는 가스 파이프 라인 프로젝트에 그리스도 참여하는 임시 협정을 체결할 전망이다.
푸틴 대통령은 5월 초 그리스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대가로 구제금융을 지원할 의향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리스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지금까지 그리스는 러시아에 금융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WSJ에 말했다.
전문가들은 치프라스 총리의 이번 러시아 방문에 대해 “외교적 포커 게임의 일환”이라며 “그리스는 EU 정상과 채권단의 일원인 국제통화기금(IMF)에 대해 어느 정도 도전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주의 깊게 계산하고 있다고 볼 수있다. 치프라스 정권은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제명된 경우 러시아에 기댈 수 있음을 반복 암시하며 EU 국가들을 견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현재 러시아는 그리스 구제에 나설 의욕도 능력도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그리스에게 러시아는 EU를 대신할 현실적인 대안이 되지 않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이 때문에 치프라스 총리는 러시아를 방문하는 동안 자극적이거나 도발적인 언행은 피할 것이라고 WSJ는 관측했다.
그리스 싱크탱크인 국제관계연구소(IIR)의 콘스탄티노스 필리스 리서치 책임자는 “이번 러시아 방문은 그리스가 당황하지 않고 있고, 치프라스는 평상시와 같이 직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며 “마지막 순간에 러시아 방문 일정을 취소했다면 오히려 부정적인 신호를 보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 입장에선 치프라스 총리와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자국에 대해 경제 제재 수위를 높이는 EU에 대한 도발로도 볼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러시아 연방의회 의원인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는 “치프라스의 방러는 우크라이나 내전을 둘러싼 EU의 대러 경제 제재 효과에 관해 EU 내에서 회의론이 확산되고 있음을 반영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리스는 올 여름에 만료되는 EU의 대러 제재의 연장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을 의향을 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