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일이]
30년 가까이 각종 범죄를 저질러 붙잡힐 때마다 남의 신분증과 주민번호를 제시해 엉뚱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준 40대가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수차례에 걸쳐 피의자 신분 확인을 소홀히 해 무고한 시민을 범죄자로 만들고 인생을 망치게 한 빌미를 줬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부산 동부경찰서는 17일 다른 사람의 신분증을 제시하고 서명을 도용한 혐의(공문서 부정행사·사서명 위조 및 동행사)로 장모(49)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장씨는 지난달 23일 오후 3시께 부산 동구의 한 기원에서 일행 4명과 함께 트럼프 도박을 하다가 경찰에 붙잡히자 평소 외우고 있던 김춘삼(51) 씨의 주민번호로 신분을 속이고 즉결심판 동의서에 김씨의 서명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장씨의 명의 도용 때문에 난데없는 즉결심판서를 받게 된 김씨가 경찰에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드러났다.
경찰은 수사에 나선 지 7일 만인 15일 오후 동구 범일동의 한 은행 앞에서 장씨를 붙잡았다.
장씨는 검거 과정에서도 친구의 주민등록증을 제시했지만 경찰의 지문 확인에 덜미가 잡혔다.
장씨는 이미 김씨의 서명을 도용한 혐의로 사하경찰서에 의해 수배된데다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에 쫓기던 신세였다.
장씨는 경찰에서 "1986년 길에서 김씨의 주민등록증을 주웠는데 주민번호를 외워 경찰에 붙잡히거나 안 좋은 일을 당할 때마다 김씨로 위장했다"며 "김씨에게 피해를 줘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씨는 "어릴 적 가정형편이 어려워 앵벌이 생활을 하면서 거지왕 김춘삼을 우상으로 여겼는데 우연히 주운 신분증의 이름이 똑같아 주민등록증을 버린 뒤에도 김씨 행세를 해왔다"고 진술했다.
장씨가 김씨 명의를 도용한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장씨는 1987년 마약 투약 혐의로 붙잡히자 김씨로 신분을 속여 징역까지 살았다.
이후로도 마약, 절도, 폭력 등 혐의로 경찰에 붙잡히기만 하면 장씨는 김씨의 신분증이나 주민등록번호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한번도 발각된 적이 없을 만큼 경찰의 신분 확인은 허술했다.
이 때문에 순탄하던 김씨의 인생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김씨는 1986년 대학생 시절 집에 도둑이 들어 신분증이 사라진 뒤 입사면접만 보면 고배를 마시고 불심검문에서 빈집털이범으로 경찰에 연행되는 등 알 수 없는 피해를 봤다.
김씨는 2000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약, 절도, 폭력죄로 전과자가 된 사실을 뒤늦게 알고 법원에 진정을 넣어 전과를 삭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장씨의 계속된 신분 도용에 김씨는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폭행·음주 뺑소니 등의 사건에 연루됐다고 누명을 쓴 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김씨는 "경찰이 주민등록증이나 지문확인 없이 주민등록번호만으로 허술하게 신분 확인을 해오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이 이렇게 송두리째 뒤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신분확인을 소홀히 해 나를 수차례나 범죄자로 만든 경찰에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장씨가 또 자신의 개인정보를 도용할 가능성이 있어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