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생각] 6월 13일 道學政治(도학정치)
지도계급이 몸소 도학을 실천하는 정치
임철순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후세의 사림파 유학자들로부터 계파를 초월해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잇는 인물로 높이 평가받은 선비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내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내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든다”는 자세로 유교의 정치, 곧 지치(至治)를 구현하겠다며 개혁정치를 주도했다.
열일곱 살 때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 땅에 유배된 김굉필의 문하에서 공부한 그는 34세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됐을 때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언로(言路)를 막은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파직하도록 요청함으로써 도학이념에 따른 개혁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그는 사림파의 경제적 토대인 향촌사회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주자가 정리한 향약(鄕約)을 보급했고, 주자학적 이념에 충실한 인재들을 선발했다. 일종의 추천제인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해 향촌에서 성장한 신진 학자들을 대거 발탁하는 등 전면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추대한 반정(反正)공신들의 공적에 허위가 많다며 엄격히 재심사해 훈작(勳爵)을 박탈하는 등 의리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는 것은 철저히 시정하려 했다.
이처럼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원칙론과 과감한 개혁 시도는 반대파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 그의 의지는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꺾이고 말았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조작한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그는 39세의 나이에 전라도 능주에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았다. 정치의 전면에 나선 지 불과 4년 만이었다.
율곡 이이는 조광조의 업적을 네 가지 주제로 간결하게 집약했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格君心], 왕도정치를 세상에 펴는 것[陳王政], 의로움이 실현되는 길을 여는 것[闢義路], 이욕(利欲)이 분출하는 근원을 막는 것[塞利源] 등이었다. fused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