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70년대 1·2차 오일쇼크로 인해 치솟은 물가와 싸우면서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명성을 얻게 됐다. 그가 연준 의장에 취임했던 해 미국 기준금리는 평균 11.2%였으나 최고치를 찍었던 1981년에는 무려 20%에 이르게 됐다. 물가를 잡겠다는 일념 하나로 공격적으로 금리를 올린 것이다.
볼커가 금리를 올리기에 쉬운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미국 경제는 당시 일반적인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 상승)’에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금리를 올리기도 내리기도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볼커가 금리인상으로 물가 잡기를 선택하면서 1979년 13.3%에 달했던 인플레이션율은 1983년 3.2%로 떨어졌다. 그 대가로 볼커는 혹독한 경기침체에 따른 비난세례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 실업률은 10% 수준으로 치솟았고 달러 가치는 폭락하고 경제는 1년 이상 위축됐다.
1982년 긴축정책이 끝나고 나서야 미국 경제는 서서히 회복할 수 있었다. 그가 1980년대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 성공하면서 미국 경제는 1990년대 물가 안정 속에 고도성장하는 사상 최대 호황기를 맞을 수 있었다는 평가다.
볼커는 재직 중에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 정도로 온갖 시위와 살해 위협까지 받았으나 결국 스태그플레이션을 극복한 뚝심은 인정을 받게 됐다. 독일 경제학자인 헨리 카우프만은 “볼커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중앙은행 총재”라고 칭송했다.
대표적인 연준 비판론자인 론 폴 전 미국 연방하원도 볼커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하원 금융위원회에 있었을 당시 아서 번스와 윌리엄 밀러, 볼커 등 연준 의장들에게 조언을 구했다”며 “가장 많이 교류한 것은 볼커였다. 그는 앨런 그린스펀과 벤 버냉키를 포함해 어떤 연준 의장 가운데에서도 가장 품위 있고 현명하다”는 찬사를 보냈다.
일본은행(BOJ)은 현재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는 ‘인플레이션 파이터’ 볼커와 전혀 다른 행보를 걷는 것이나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는 지난 3월 한 연설에서 “통화정책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과 사고방식을 바꾼 전례로 볼커가 있다”며 “볼커는 정치와 사회적으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인플레이션 기대를 바꾸기 위한 정책 행보를 이어갔다”고 말했다. 볼커의 뚝심을 벤치마킹하고 싶다는 의미다.
볼커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다시 주목을 받았다. 버락 오바마가 지난 2008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되자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아 지난 2010년 금융위기 주범으로 꼽힌 대형은행 관련 규제를 강화한 ‘볼커 룰’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월가에서 지나친 규제로 금융산업이 고사할 것이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것으로 ‘파이터’다운 면모를 다시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