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부처 간 회의도 주재하는 부처 공무원의 직급이 뭐냐를 봐 가며 참석자를 결정한다. 이를테면 저쪽의 장관이 주재하면 차관이 참석하고, 차관이 주재하면 차관보급, 그리고 차관보급이 주재하면 국장이 참석하는 식이다.
이러다 보니 부처 간 협조가 필요한 위기관리 업무 등은 컨트롤 타워가 수시로 총리까지 올라간다. 총리쯤 되어야 장관들을 모두 불러 모아 협조를 요청하거나 지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의 메르스 건도 그렇다. 최경환 국무총리 대행이 귀국해 컨트롤 타워를 장악하고 나서야 뭔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의문이 생긴다. 왜 그렇게 높은 사람이 컨트롤 타워가 되어야 해? 보건복지부 장관이나 그 아래의 질병관리본부장이 하면 안 돼? 모두들 고개를 젓는다. 높은 사람이 해야 관계기관 간의 협조도 잘 이루어지고,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도 잘 동원할 수 있다는 거다.
그래도 그렇지. 문제를 가장 잘 알고, 또 잘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컨트롤 타워가 되는 것이 위기관리의 기본 아닌가? 흔히 예로 드는 미국의 911사태, 즉 항공기 테러로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내려앉았을 때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누가 컨트롤 타워였나? 국토안보부 장관도 뉴욕시장도 아닌 뉴욕 소방서장이었다.
생각해 보자. 연금 전문가로 메르스와 의료체계는 물론 행정에도 익숙하지 않은 장관, 그 위에 다시 방역체계와 의료체계를 잘 알 리 없는 국무총리 대행, 도대체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보고와 설명을 거쳐 결정들이 이루어질까? 또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정보가 잘못 전달되거나 왜곡될까?
그뿐 아니다. 조직운영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책임의 문제와 보상과 징벌의 문제도 뒤틀린다. 간단히 911사태 때 국토안보부 장관이나 뉴욕시장이 컨트롤 타워였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모든 책임이, 또 모든 보상과 징벌이 이들에게 간다고 생각해 보자. 뉴욕 소방서장과 소방대원들이 그때와 똑같이 움직였을까?
계층이나 단계가 많을수록 실제로 문제를 푸는 사람들의 책임의식은 옅어진다. 이번에 있었던 보건복지부와 지방정부 간의 불협화음도 그렇다. 실제로 문제를 푸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책임지는 일이었다면 이들은 스스로 지방정부를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을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문제를 풀어야 했을 것이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격리 대상자의 관리 문제 등 지방정부의 협조가 절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층층 구조에 책임은 흩어졌다. 또 그 속에서 실제로 문제를 푸는 사람들은 오히려 지방정부와 경쟁하는 양상이 되어 버렸다. 문제를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도권과 공(功)을 놓고 지방정부와 다투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다.
잘못된 관행이고 잘못된 문화이다. 이런 체계로는 효과적인 위기관리를 할 수 없다. 과거와 같은 농경사회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전문성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문제가 적은 데다 이를 해결하는 데 쓸 수 있는 수단 또한 그리 복잡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문제부터 어렵고 복잡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전문적 식견과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행정문화상 지금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이를테면 대통령이 누가 되었건 문제를 잘 풀 수 있는 사람을 컨트롤 타워로 앉힌 후 장관들까지 지휘할 수 있는 지위와 권한을 주면 된다. 그리고 청와대가 이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관리해 주면 된다.
이런 일은 하지 않고 병원 명단을 공개하라, 마라 직접 관여하고 있는 모습 등은 보기에 좋지 않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할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아울러 한마디 더 하자. 과거 정부들의 경우 계서주의의 엄격함을 완화하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정부에서는 그러한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이 또한, 다음의 또 다른 문제를 위해 잘 살펴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