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로 ‘아주 좋다’는 뜻의 세시봉(C’est si bon)은 서울 무교동에 있던 음악감상실의 이름이다. 세시봉 친구들은 이 몇 년 사이 콘서트를 여러 번 열었다. 1960~70년대의 추억을 되살리는 이야기와 노래는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몇 달 전에는 ‘쎄시봉’이라는 영화도 나왔다.
나는 윤형주가 그렇게 많은 CM송을 만든 사람인 줄 몰랐다. 그는 이날 방송에서는 부를 수 없는 노래를 여러 가지 들려주었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 드려요”라고 하는 오란C 광고, “좋은 사람 만나면 나눠주고 싶어요”라는 롯데껌 광고 등 지금까지 800곡 이상의 CM송을 만들었다니 그 재능이 정말 놀라웠다.
그러나 공연의 중심은 역시 조영남이었다. 어두운 객석에서 갑자기 나타난 그는 안경을 벗어 못생긴 얼굴을 클로스업시키고, 전처들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다리에 걸쳐진 팬티를 보면서 벗으려던 건지 입으려던 건지 헷갈렸다고 치매기를 과장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둥이이니 그도 벌써 일흔한 살이다.
‘화개장터’를 부르고 난 공연 막바지에 그는 검은 관을 무대에 올리고 ‘조영남 영결식’을 연출했다. 관 앞에서 자기 자신을 평가하고 다른 사람들도 조문을 하는 흉내를 냈다.
그러면서 그는 가수장(歌手葬) 이야기를 꺼냈다. 가수가 죽으면 장례식에서 히트곡을 불러준다고 한다. 그런데 ‘선창’으로 유명한 고운봉(1920~2001)의 장례 때, 얼굴만 봐도 우스운 만담가 남보원이 찬송가 조로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하고 불러 웃음바다가 됐다. 남보원은 봉봉4중창단(조영남은 블루벨스 4중창단이라고 잘못 말함)의 멤버를 보고는 “형님 노래는 ‘잔치 잔치 벌였네. 무슨 잔치 벌였나’ 그거밖에 더 있어? 그거 불러줄게” 그래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만든 게 ‘모란동백’이니 이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무슨 노래를 불러 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 나는 가수가 아니니 장례식에서 노래를 불러줄 필요는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남들이 무슨 노래로 나를 기억해 줄까 하는 생각이었다.
세시봉 친구들은 그날 통기타를 하나씩 메고 무대에 섰는데, 통기타는 그들 삶의 버팀목이며 지지대인 것 같았다. 그것 없이 서 있는 모습은 어색하고 어정쩡할 것 같았다. 그걸 보면서 ‘나의 통기타’는 무엇인지도 생각했다.
자신의 죽음을 이야깃거리로 만들어 남들과 즐기는 공연을 할 만큼 세시봉 친구들은 충분히 농익어 있었다. 그들이 우정을 맺은 지 벌써 반세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