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꽃이다. 속살 드러낸 자태, 눈부셔라]
요염하게 생긴 봉오리들이 생긋생긋 웃는다. 봄 바람의 속삭임에 작은 꽃망울들이 방긋방긋 미소 짓는다. 4월의 꽃은 화려하고 눈부시다. 설렘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이 꽃으로 물들이고 웃음꽃이 만발한다. 시를 닮은 4월, 4월의 꽃은 그리움일 수밖에. 마침내 마음의 뜨락에 꽃씨 뿌리다. <편집자 주>
꽃이라는 것은 묘한 마력(魔力)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력 말이다. 꽃 한 송이로 사랑의 감정이 싹 트기도 하고, 메마른 일상에 촉촉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꽃이다. 꽃이 한 여자를 화가로 만들었다. 꽃그림으로 일상의 우울함을 설렘으로 바꿔버렸다. 그림 작가 원은희가 꽃그림으로 설렘과 행복, 웃음을 전한다. 캔버스 안의 꽃다발로.
한마디 한마디가 조근조근하다. 거기에 생글생글한 미소로 무장한 그녀와 이야기 꽃을 피우면 금세 10대 소녀와 대화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녀가 별빛이 쏟아지고, 파아란 바닷물이 넘실대는 남해의 한 마을에서 야생화를 따 소꿉놀이를 하던 소녀 시절을 이야기한다. 그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눈빛이 초롱초롱해지기 시작한다.
커다란 책가방을 들고 다니던 시절, 등굣길에 화단의 꽃을 꺾어 선생님께 선물한 이야기, 도시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오빠들이 8남매를 옹기종기 모아 가곡을 불러준 이야기, 언니들이 사다 준 식물도감으로 꽃을 관찰한 이야기 등 수다의 꽃을 피운 그녀는 영락없는 소녀다.
그래서일까.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한 53세 소녀에게서는 긍정의 아우라가 흘러넘친다. 그녀를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머금어지는 것은 그 아우라에 취해서이리라. 그래서 원 작가는 꽃이다. 보는 것 그리고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낭만적이고 위로가 되는 그런 꽃 말이다. 그녀가 모든 것을 놓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시절을 위로해줬던 꽃 그림. 이제는 그런 인생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에게 그녀가 꽃다발을 건넨다. 몇 년 전 자신이 받은 위로의 꽃다발에 사랑과 희망을 담아.
◇ 꽃은 위로였다
2012년 묵호항. 주부 일로 인생의 반을 바친 그녀가 홀로서기를 선언하고 떠난 곳이다. 홀로서기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익숙지 않은 사회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고, 가족에게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가 물밀 듯이 쏟아졌다. 또한 신체적 변화에서 오는 우울감을 던지기 위해 묵호항을 찾은 것이다. 묵호항에서 찌든 때를 씻어내고 올라와 그녀가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색연필. 그리고 묵호항에서 본 등대를 그리기 시작했다. 남들 눈으로 보기엔 틀림없는 꽃이지만 그녀는 그것이 틀렸다고 일침을 가하는 듯 ‘등대’라는 두 글자를 새겨 놓았다. 누가 봐도 일반인이 연습장에 장난을 쳐 놓은 듯한 그 끄적임 하나가 인생을 180도로 바꿔 놓을 것이라고는 그녀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다.
“꽃과 등대. 무엇인가 길잡이가 되고 희망이 된다는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등대를 꽃으로 표현해 봤는데 저 자신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는 겁니다. 꽃 그림을 그리는 거요? 처음에 그것은 제가 살기 위한 것이었어요. 저를 위한 위로의 꽃다발을 그리다 보니 어느새 마음에 꽃이 피어나더라고요.”
그때 시작한 그림의 세계. 배워보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그림은 독창적이고 감각적이다. 거기에 향긋한 꽃의 마력까지 담겨 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의 그림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삶과 꽃에 대한 깊은 고찰 덕분이리라. 그리고 어린 시절 꽃과 함께 했던 순수함이 그림으로 발현돼 위로의 매개체로 승화했다.
“견디기 힘든 것을 견뎌냈더니 그림이라는 선물을 받게 됐어요. 꽃 그림은 저를 위한 시(詩)이자 기도였는데 이제 다른 사람들이 그런 기운을 느낀다고 하니까 신비로운 일이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또 다른 힘이 솟습니다. 꽃을 주는 것은 고마움을 표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계속 이 고마움을 드려야겠어요.”
◇ 매일 매일 꽃다발을 주겠어요
“꽃을 준다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잖아요.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고, 감사를 표시하기도 하고,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요. 사랑, 감사, 위로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긍정적인 수식어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꽃 그림을 그리는 것이죠. 그 꽃 그림 꽃다발을 받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말이에요.”
어린 시절 언니들이 사온 식물도감이 닳도록 식물 관찰에 몰두했던 호기심 대마왕 소녀는 이제 매일 자신이 그린 꽃다발을 매일 사람들에게 주는 상상을 한다. 그래서 그림을 선물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다. 요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한 법이라는 것을 오감으로 깨닫고 있는 그녀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렸지만 이제는 보는 이의 행복한 표정도 그림을 그리는 이유 중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꽃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 뿌듯함을 숨길 수가 없단다.
“어느 날은 제 그림을 본 사람들이 길거리의 꽃을 찍어서 저한테 보여주더라고요. 이게 어떤 꽃이냐고 하면서요. 그때 참 뿌듯했죠.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을 나로 말미암아 한 번 더 보게 돼 그 생명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니까요. 꽃을 보는 사람이 누구나 그렇듯이 그분도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아름답다고 생각했겠어요?”
◇ 자유분방함 속 메시지
원 작가는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경험이 없다. 그 덕분인지 그녀의 작품은 하나같이 어떤 방식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분방하다. 또 3년차 작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삶에 대한 잔잔한 메시지가 담겨 있기도 하다. 보는 이들은 그 작품의 색감과 감각적 요소를 보고 미소를 머금지만 그 안에 새겨진 메시지를 알아차렸을 땐 진한 감동과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그녀가 그린 ‘재회’라는 작품은 노란 옷을 입은 소녀가 노란 나비에 둘러싸여 달콤한 상상에 빠져 있다. 눈으로 본 그림에서는 봄냄새 물씬 풍기는 따뜻함이 전해지지만, 사실 원 작가는 여기에 4·16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메시지를 담았다. 비탄함을 넘어 노란 나비와 함께 행복한 곳에서 재회할 수 있는 날을 꿈꾼다는 뜻이다.
본인의 추억이 담긴 작품도 있다. ‘엄마의 빨랫줄’이라는 작품에는 남해 소녀시절 어머니가 마당에 널어놓았던 생선들과 빨래, 그리고 꽃들이 형형색색으로 표현됐다.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50대 원은희가 아닌 소녀 원은희로서의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작품이다.
원은희 그녀의 그림 인생의 미래는 아직 정해진 것이 없다. 그래서 더욱 행복하고, 떨리고, 기대가 되고 설렌다는 수식어를 모두 붙이는 그다.
“그림을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런지 제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제 그림의 특징입니다. 제가 꽃을 보고 느끼는 것.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 세상을 보면서 느끼는 것을 가감 없이 그림에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슬프거나 우울하게 표현하지는 않을 거예요. 세상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거든요.”
그녀는 ‘일단 살아는 있어야 돼’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그림들을 자살예방센터에서 전시했던 것을 공교롭다고 표현했다. 또한 지난해에는 서울 문학의 집에서 ‘매일 매일 꽃다발을 드릴게요’라는 개인 전시회를 열고 서울발레시어터 LIFE 콘서트에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이렇게 전시회까지 열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은 그림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는 그녀다.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꽃 그림은 제게 정말 많은 것을 가져다 줬어요. 위로뿐만 아니고 많은 좋은 사람도 얻게 해줬으니까요. 그리고 전시의 기회도요. 그리고 예전의 저처럼 심적으로 힘든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