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구조에 따라 재계와 금융권 주요 그룹의 행보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전문경영인 체제를 통해 기업을 키우는 현실이 얼마만큼 중요한 행보인지 자세히 보여주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메리츠금융그룹과 한진그룹이다.
2002년 한진그룹 창업자인 고(故 ) 조중훈 회장이 타계했다. 3년 뒤인 2005년 한진그룹은 계열 분리에 나섰다.
이후 장남 조양호(58) 한진그룹 회장, 차남 조남호(56) 한진중공업그룹 회장, 3남 고 조수호 전 한진해운 회장, 4남 조정호(49) 메리츠금융그룹 회장 등이 모그룹에서 분가(分家)를 시작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계열분리 이후 10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이들의 경영행보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그리고 그 엇갈림의 중심에 지배구조가 있었다.
◇지주사 체제, 전문경영인으로 안정 성장한 메리츠금융그룹 = 그룹모태인 한진그룹은 대한항공을 중심으로 성장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중공업과 해운도 차남과 3남의 경영체제 속에서 본격적인 시장 확대에 나섰다.
반면 4남 조정호 회장의 메리츠금융그룹은 홀로서기 초반부터 한진의 기존 계열사와 궤를 달리했다. 운송과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기존 한진과 달리 금융, 바로 메리츠금융그룹으로 출발했다.
메리츠금융그룹은 모그룹과 분리되면서 지주사 체제를 갖췄다. 지배구조를 투명화하기 위해서다. 그룹에서 분리된 이후 전문경영인 체제를 발빠르게 도입해 안정 성장을 추구한 것도 특징. 시장 안정화가 이뤄질 무렵 다시금 총수가 지분을 확대하면서 체제를 갖추기도 했다.
조정호 회장의 메리츠금융그룹은 한진그룹 계열분리 당시 가장 먼저 분가한 곳이기도 하다. 2005년 3월 당시 동양화재보험(현 메리츠화재)이 그룹에서 계열분리하면서 메리츠금융그룹의 홀로서기가 본격화됐다.
메리츠증권과 메리츠화재는 2006년 11월 한진그룹 계열사들과 소시에떼제너럴(SG)이 보유하고 있던 한불종합금융 지분을 인수, 보험·증권·종금으로 이어지는 금융그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모태는 1973년 2월 한일증권으로 설립돼 1990년 10월 한진투자증권으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2000년 3월 메리츠증권으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본격적인 독립 경영을 준비했다.
무엇보다 지난 2007년 지주회사를 구축하면서 탄탄한 지배구조를 갖추기 시작했다.
자산운용사와 저축은행, 캐피털 등을 앞세워 금융업계의 다양한 포지션 변화를 구축한 상태에서 지주사 체제는 필수불가결한 상황이기도 했다.
메리츠금융그룹의 지배구조는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메리츠금융그룹의 정점은 메리츠금융지주다. 지난해 연말 기준 메리츠금융지주는 메리츠화재 50.01%, 메리츠종금 40.02%를 비롯해 메리츠캐피탈과 메리츠자산운용, 금융서비스, 비즈니스서비스의 100% 지분을 각각 보유하고 있다. 가장 정점에 조정호 회장이 이 지주사 지분 75.36%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조 회장이 지주사를 거느리고 있지만 각 계열사는 전문경영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지배구조를 투명화하고 계열사별 CEO에게 경영 전권을 일임해 책임경영이 가능하도록 했다.
조정호 회장은 그동안 금융지주사를 지켜내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오기도 했다. 메리츠금융지주는 2011년 금융위원회로부터 ‘메리츠화재의 지분을 50% 이상 소유해야 한다’는 조건부로 금융지주 인가를 받았다. 이후 2013년 싱가포르투자청(GIC)이 555억원 규모 유상증자에 참여하면서 이 비율이 50% 미만으로 떨어졌다. 금융위의 금융지주 인가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게 된 셈. 조정호 회장은 곧바로 금융지주사의 지분율에 맞춰 449억3760만원 규모의 제3자 유상증자에 참여했다. 이를 통해 안정적인 경영권(75.36%)을 확보했다.
이렇듯 금융지주사 지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가운데에서도 총수 일가의 계열사 경영참여는 없었다. 꾸준히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시장 안정화를 지켜왔다는 게 금융권 전반의 분석이다.
지난해 상반기 신용등급이 올랐던 증권사는 메리츠종금증권과 유안타증권이 유일했다. 한국기업평가원은 메리츠종금증권의 신용등급 상향조정에 대해 “종합금융업 겸영에 따라 메리츠종금증권의 경쟁력이 우수하고 이익도 늘어나는 추세가 반영된 결과”라는 입장을 밝혔다.
기업지배구조 펀드로 유명한 존 리 대표를 영입하면서 임기 10년을 보장했다. 그 결과 메리츠자산운용 수탁고는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다. ‘메리츠코리아’는 국내 대표 펀드 반열에 오르고 있다.
◇순환출자구도 해소에 10년 허비한 한진 =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전혀 다른 지배구조를 지닌 곳은 창업주의 장남인 조양호 회장이 이끌어온 한진그룹이다.
한진그룹은 지난 2013년 대한항공 분할과정을 거쳐 순환출자구조 해소 작업에 나섰다. 인적 분할을 통해 지주회사 한진칼과 대한항공을 나누고, 이후 순환출자 고리에 있는 다른 계열사들의 합병을 통해 지주사 체제로 전환한다는 방침이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대선 공약 중 하나인 순환출자 구조 금지 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보다.
‘한진칼→정석기업→한진→한진칼’로 이어지는 순환고리를 해소하기 위해 ‘한진칼과 정석기업 합병’, 또는 ‘정석기업과 한진 합병’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조양호 회장이 한진칼의 대주주가 되는 것도 방법이었다.
결국 한진그룹의 순환출자 구조 해소는 지난해 12월이 돼서야 해결됐다. 한진칼 대주주가 한진에서 조양호 회장으로 변경되면서부터다.
한진칼은 지난해 12월 최대주주가 종전 한진 외 15인에서 조양호 외 13인으로 변경됐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한진은 앞서 한진칼 지분 5.28%를 블록딜로 매각하기도 했다. 한진이 한진칼 지분을 전량 매각하면서 한진그룹의 순환출자 고리는 결국 끊어지게 됐다. 블록딜을 통해 한진칼→정석기업→한진 순의 수직구조로 바뀐 셈이다.
한진칼의 최대주주는 조양호 회장으로 변경돼 오너의 지배구조가 확고해진 셈. 조양호 회장 일가의 한진칼 지분율은 26.14%다.
반면 이같은 수직구조를 본격화하는 데 2005년 계열분리 이후 꼬박 10년이 걸렸다. 여전히 한진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선 자회사와 손자회사 간 지분정리를 마무리해야 한다.
지주회사는 상장 자회사 지분 20%를, 비상장 자회사 지분 40%를 갖고 있어야 하며 지주회사의 자회사 역시 상장 손자회사 지분 20%를, 비상장 손자회사 지분 40%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순환출자를 이어오는 동안 계열사 주요 경영진에 총수 일가가 포진하기도 했다. 전문경영인 대신 3세 경영인이 경영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맹점에서 불거진 사례 가운데 하나가 이른방 땅콩회항이기도 하다.
메리츠금융그룹이 지배구조에서 오너 일가의 지분구조를 안정화하면서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하는 등 모범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반면 한진그룹은 여전히 지배구조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더구나 오너 일가가 직접 경영권을 행사하면서 ‘땅콩회항’과 같은 대참사를 불러오기도 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 해법을 명확하게 찾지 못하고 3세가 경영권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진그룹과 메리츠금융그룹의 대조적인 행보는 향후 5년, 10년 안에 투자자들의 평가를 또다시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