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운디드 니’를 돌아보라

입력 2015-02-27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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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내 오른쪽 무릎에는 종기를 앓은 자국이 몇 군데 있다. 중학입시(1964년 당시엔 학교별로 시험을 쳤다) 공부에 집중해야 할 초등학교 6학년 때 갑자기 무릎에 종기가 번져 공부는커녕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종기가 커야 고름이 많다’는 얄궂은 속담도 있지만, 누런 고름을 짜낼 때의 기분 나쁜 기억을 지울 수 없다.

한의학자 방성혜씨의 저서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에 의하면 조선의 왕 27명 중 12명이 종기를 앓았고, 문종 성종 정조는 종기 때문에 결국 죽음을 맞았다. 종기는 관절에 고름이 차는 관절염도 되고, 뼈가 썩는 골수염도 되고, 오장육부가 썩는 암도 된다. 요즘엔 잘 안 걸리는 피부병이지만 과거엔 치명적이고 무서운 병이었다.

무릎의 상처를 보며 조선 16대 왕 인조의 삼궤구고(三跪九叩)를 생각한다. 궤(跪)는 무릎을 꿇는 것, 고(叩)는 머리를 땅에 닿게 하는 것이다. 삼배구고(三拜九叩)라고도 한다. 1637년 1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한 인조는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짚은 뒤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세 번, 이것을 한 단위로 세 번 되풀이했다. 그 씻을 수 없는 치욕은 인조의 무릎과 조선의 역사에 깊이 새겨졌고, 서울 송파의 삼전도비에 고스란히 남았다.

운디드니 대학살사건도 생각한다. 1890년 12월 29일, 미 제7기병대 500여 명이 수(Sioux)족 여성과 어린이 등 250여 명의 인디언을 학살했다. 미군은 이들을 무장해제할 때 한 명(귀가 어두운 사람이었다고 한다)이 말을 듣지 않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학살사건이 벌어진 운디드니 계곡은 라코타 족과 크로 족이 싸울 때 어떤 유명한 전사가 무릎에 상처를 입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을 영역한 것이다. 그러니까 운디드니는 인디언 말이 아닌 것이다.

‘수’라는 이름도 프랑스인들이 붙인 것이다. 수족은 자신들을 라코타 또는 다코타(동맹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학살당한 부족의 이름은 노스 다코타, 사우스 다코타라는 주명에 남아 있다.

이 사건으로 미군(미국)과 인디언의 전쟁은 끝났지만, 운디드니 대학살은 미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이자 상처로 남았다. 운디드니는 그야말로 미국의 ‘Wounded Knee(상처 난 무릎)’이다. 스웨덴 속담에 “슬픔이 무릎보다 높아지지 않도록 하라”는 게 있던데, 그 말을 바꾸면 “수치가 무릎보다 높아지지 않도록 하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승무원들을 무릎 꿇린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을 계기로 무릎에 관한 이야기를 이번까지 다섯 번이나 썼다. 이제 다른 화제로 넘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슬갑도적(膝甲盜賊) 이야기를 하자. 슬갑은 겨울에 추위를 막기 위해 무릎까지 내려오도록 바지 위에 껴입는 옷이다. 말하자면 부자들의 방한복이다. 그런데 가난한 도둑이 슬갑을 훔친 뒤 이걸 어떻게 쓰는지 몰라 머리에 쓰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문장이나 학설을 그대로 따르고 표절하면서도 그 뜻을 모르는 경우 슬갑도적이라고 한다. 남의 글을 표절하는 사람이 슬갑도적이다.

인간의 고통과 수치와 불명예를 무릎은 다 기억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운디드 니’의 아픔과 상처가 있을 수 있다. 그걸 서로 헤아리고 살펴 주어야 한다. 다섯 번의 무릎 이야기가 부디 슬갑도적의 행태가 아니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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