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무릎을 모으라, 그리고...

입력 2015-02-06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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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나는 무릎이 약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랄 때 무릎을 자주 꿇는 바람에 발육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어려서 남의 집에 가면 할아버지와 사랑방에서 기거하며 익힌 예법이랍시고 무릎을 꿇고 앉곤 했다. 편히 앉으라고 말해 주기를 기다리며 공손한 척 무릎을 모으고 앉았던 게 지금 생각하면 같잖고 우습다.

옛날엔 어른이나 스승 앞에서 이렇게 무릎을 모으고 옷자락을 바로 하여 단정하게 앉는 게 당연한 예법이었다. 바로 염슬위좌(斂膝危坐)·염슬궤좌((斂膝跪坐))·염슬단좌(斂膝端坐)다. 이른바 수렴신심(收斂身心)의 이런 자세는 스승과 어른의 가르침을 몸 안에 잘 받아들이기 위한 게 아닐는지. 처녀들의 단단하게 모은 무릎이 정절과 순결의 표상인 것처럼.

안동 도산서원의 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 종손과의 대화’라는 수련시간을 운영하고 있다. 여든을 넘긴 종손은 수련생들을 처음 맞을 때 그 나이에도 큰절을 한 다음 꿇어앉은 자세로 50분가량 대화를 한다고 한다. 이런 앉음새는 예전 선비들에게는 일상적 자세였다.

김병일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의 글에 의하면 경(敬)이 핵심인 퇴계철학이 임진왜란 전후 일본에 전파될 때 이 예법이 함께 건너가 오늘날 일본의 문화전통이 됐다고 한다. 잘 알다시피 일본인들은 요즘도 무릎을 꿇고 손님을 맞는다. 우리나라의 온돌방과 달리 다다미가 무릎에 부담이 덜한 점도 한 요인일 것 같다.

퇴계의 종손은 무릎 꿇기가 몸에 배인 데다 이 자세가 허리를 꼿꼿하게 해 주어 더 좋다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편히 앉으라고 한다는데, 요즘 세상에 그 자세가 편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등산 사이클 마라톤 등을 즐기는 사람들은 무릎에 신경을 많이 쓴다. 스포츠에서는 특히 무릎이 중요하기 때문에 무릎 보호대가 잘 팔릴 것이다. 1만원대부터 8만원대까지 값이 천차만별이다.

무릎은 ‘가난에 구애되지 않고 평안하게 즐긴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표상이기도 하다. 너무 비좁아 겨우 무릎이나 움직일 만한 장소를 용슬(容膝)이라고 한다. 도연명이 <귀거래사>에서 ‘남쪽 창에 기대어 거리낌 없이 앉으니 용슬이지만 편안한 걸 잘 알겠네’(倚南牕以寄傲 審容膝之易安)라고 한 뒤부터 용슬은 안빈낙도의 의미를 갖게 됐다. 용신(容身)도 비슷한 뜻이다.

그렇게 겨우 무릎을 들일 만큼 비좁은 곳에서, 무릎을 맞대고 간담상조(肝膽相照)하는 우정을 기르며 한잔 술에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천하의 일과 글을 논하는 삶은 곤궁하지만 멋과 흥이 넘친다. 귀거래사 이후 용슬을 시구에 쓰거나 이안(易安)을 당호로 삼은 선비들이 많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은 무릎을 껴안고 길게 읊조리다가 친구들에게 “자네들은 벼슬길에 나가면 자사나 태수쯤은 될 수 있을 걸세”라고 말한다. 그들이 “그러면 자네는?” 하고 되묻자 제갈량은 그저 웃으며 무릎을 쓸면서 길게 읊었다. 삼국지의 명장면 중 하나다.

이때 제갈량의 무릎은 천명에 대한 자기인식의 무릎이요 경세제민의 자신감을 담은 무릎이 아니었을까. 제갈량은 결국 그 무릎을 삼고초려의 정성을 다한 유비를 위해 일으켜 세웠고, 그 이후에는 <출사표>라는 명문에 길이 새긴 국궁진췌(鞠躬盡瘁)의 매운 충절로 신명을 다 바쳤다.

사람은 누구나 무릎을 아끼고 성실하게 가꿔야 한다. 그런 무릎을 꿇으라고 남에게 함부로 강요하는 사람은 다 ‘나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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