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자녀상에 대한 최근 국민 교육 여론조사 결과는 이런 시대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교육개발원이 매년 실시해온 이 조사에 따르면 올해 우리나라 부모들은 놀랍게도 자녀가 ‘따뜻한’ 사람이 되기를 가장 원했는데 21세기 대세인 ‘창의적’ 사람을 제끼고 16.3%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20년 전 불과 4.6%로 8개 선택지 중 꼴찌였으니 참 놀라운 변화이다. 국민들에게 꾸준히 인기를 얻었던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20년 동안 41.3%에서 13.8%로 감소한 반면 ‘정의로운’ 사람은 7.2%에서 13%로 올랐다.
제품디자인, 마케팅, 기술혁신, 학교교육, 공공서비스, 국가행정 등 실로 많은 분야에서 공감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공감 논의의 기원을 따라 올라가보면 최초로 틀을 갖춘 공감이론을 내놓은 아담 스미스, 진화과정에서 드러난 인간의 협력과 호혜성에 주목한 다윈, 안나 카레리나에서 상대에 완벽하게 이입된 장면을 기술한 톨스토이 등 많은 석학들에게 공감은 놓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한 측면이었다. 미래학자 리프킨은 ‘공감의시대’에서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종이 된 것은 자연계 구성원 중에 인간이 가장 뛰어난 공감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며 인간을 호모 엠파티쿠스라 불렀다. 공감은 이제 우리의 인간성을 정의하는 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공감이 그토록 좋은 것이라면서 왜 더 많이 공감하지 않는가? 더구나 뇌 안의 공감장치는 누구나 갖고 태어날 뿐 아니라 쓰면 쓸수록 더 촘촘하고 정교해지는데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나이가 들수록, 지위가 올라갈수록 공감 결여이기 쉽다. 또는 선택적으로 작동한다. 권력있는 사람에게는 강력히 발휘되고 만만한 사람에게는 작동치 않는다. 인류의 고통은 공감이 되나, 내 아버지의 어려움은 공감이 안된다. 드라마의 불륜은 공감이 되나 내 가족의 불손한 행동은 공감이 안된다. 공감을 위한 생리적 기반은 갖춰져 있으나 훈련과 경험을 통해 즉시 작동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려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감을 가로막는 것 중에는 공감력을 발휘하면 약해 보이거나 손해본다는 생각이 있다. 특히 냉혹한 비즈니스 세계와는 맞지 않아 보인다. 기업에게 공감 역량은 가시적이지 않고 정량화가 어렵기 때문에 개발 및 관리의 어려움을 느낀다. 최근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한 아티클은 구성원, 고객, 소셜미디어 등 세 차원으로 측정한 기업별 공감지수를 발표하며 기업의 공감이 어불성설이 아님을 설명했다. 영국에 있는 기업을 대상으로 한 이 리스트에 따르면 1위는 링크트인으로 고객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의 채널로서 자신들의 플랫폼만을 고집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라이벌인 트위터를 지지하기도 한다. 2위 마이크로 소프트, 7위 구글, 21위 아마존, 43위 애플, 45위 삼성이다. 진단 결과는 각 기업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는 데 도움된다. 예를 들어 3위를 차지한 아우디에 비해 35위의 벤츠는 소셜미디어의 활용에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이제 기업의 공감지수는 전략적 의사 결정의 중요한 축이 된다.
좋은 소식은 조직이건 개인이건 공감은 배울 수 있고 증진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영유아를 교실로 초대해 공감을 가르치는 ‘공감의 뿌리’ 수업은 아이를 바꾸고 학교를 바꿨다. 타인에게 주의 기울이기, 상대 입장으로 건너가기, 의식적 상상력 발휘하기, 타인의 감정 알아차리기, 내 말로 확인해주기 연습이 도움이 된다. 현대사회를 파편화시키고 있는 자기몰입적 개인주의를 벗어나 협동과 연대의 사회로의 이행은 일상의 작은 공감 훈련으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