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받는 기업.’ 기업을 이끄는 경영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기업의 모습이다. 기업의 사회적 역할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는 가운데 기업이 ‘돈 버는 역할’뿐 아니라 ‘베푸는 역할’을 통해 사회 구성원과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소비자들은 좋은 기업의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소비하길 원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스웨덴의 대표 명문가인 발렌베리 가문은 존경받는 부자의 표본이다. 발렌베리 그룹은 스웨덴 최대 기업이면서 동시에 스웨덴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하며 158년간 ‘이윤 추구’와 ‘사회적 책무’ 두 가지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롤 모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존경받는 부자가 돼라’는 가훈에서 그 정답을 찾을 수 있다.
◇후계자는 ‘존경’의 가치 실현할 인물로= 5대에 걸쳐 158년간 명맥을 이어온 발렌베리 그룹은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국민기업이다. 수치만 보면 시장을 독점하며 이익 만을 추구하는 이미지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스웨덴 국민 중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국민들은 경범죄조차 저지르지 않는 발렌베리 가문과 발렌베리 그룹이 있다는 사실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발렌베리 가문이 스웨덴을 넘어 전 세계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정당한 기업활동과 사회적 책무 등 두 가지 과제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렌베리 가문은 5대에 걸쳐 ‘존경받는 부자가 돼라’는 가훈을 충실히 실천하며 자연스럽게 존경받는 가문과 기업으로 우뚝 섰다.
발렌베리 그룹의 시초는 금융업이다. 발렌베리 그룹의 창업주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는 1816년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 남쪽으로 200여㎞ 떨어진 린세핑에서 태어났다. 안드레는 17세가 되던 해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군인으로서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금융업에 눈을 뜬 안드레는 스웨덴으로 돌아와 1856년 금융사업에 투신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SEB의 전신인 스웨덴 최초 민간은행 스톡홀름&스킬다 은행을 세웠다. 그의 은행은 19세기 후반 스웨덴 경제의 부흥기를 타고 성장가도를 달렸다. 은행업을 통해 큰 재산을 모은 그는 기업 인수합병에 눈을 돌렸고, 그 결과 오늘의 발렌베리 그룹이 탄생했다.
이후 발렌베리 가문의 첫 번째 결단이 이뤄졌다. 창업주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는 21명의 자녀 가운데 혼외 자식인 크누트 아가손 발렌베리를 후계자로 낙점하는 예상 밖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유지를 받들 적임자에 그룹을 맡기면서 ‘존경받는 기업’을 만들고자 한 의지를 다시 한번 확고히 한 것이다. 크누트가 이끈 발렌베리 그룹은 스톡홀름&스킬다 은행 아래 수많은 제조업체들을 합법적으로 거느리며 한 단계 성장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크누트 역시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이 아닌 동생의 두 아들인 조카 야콥 발렌베리와 마커스 발렌베리 주니어를 택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결정은 창업주 안드레와 같이 존경받는 기업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됐다. 발렌베리 그룹은 당시 최대 알짜 기업이었던 에릭슨과 스웨덴 성냥을 헐값에 인수하며 스웨덴 최대 그룹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발렌베리 그룹은 현재 에릭슨, 사브, ABB 등 각 산업 분야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18개 기업을 보유하고 있다.
◇기업 수익 재단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발렌베리 가문의 진정성은 이들의 재산 총액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발렌베리 그룹 산하 기업들의 시가총액은 스웨덴 증시의 절반가량을 차지하지만 이들 가문이 보유한 주식과 재산은 다 합쳐서 몇 백억원대에 그친다. 다른 산업계 명문가가 수조 달러를 넘나드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수준인 셈이다.
이는 회사의 수익이 모두 재단으로 들어가는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다. 기업 활동을 통해 축적한 부를 자신들의 몫으로 돌리지 않고 기부와 자선활동에 사용하며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재단은 발렌베리 그룹의 2대 경영자 크누트가 시작했다. 그는 그룹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1917년, 현재 시가로 대략 250억 크로나(약 3조5000억원)에 이르는 전 재산을 기부해 크누트&앨리스 발렌베리 재단을 설립한다. 이 재단은 이후 스톡홀름경제대학과 각급 도서관을 설립하는 등 공익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고 특히 과학기술 분야 후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기부 전통은 대를 이어 지속되며 발렌베리 가문의 불문율로 자리잡았다. 3대 경영자인 마커스 주니어 등을 비롯한 나머지 후손들 역시 자선재단을 만들어 지금까지 활발하게 운영 중이다. 마리앤느 마커스 발렌베리 재단과 마커스 앤 아말리아 발렌베리 추모 재단 등이 대표적이다. 그룹 전체의 20여개 재단은 스웨덴 사회의 공익사업에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철저한 독립경영 원칙도 발렌베리 가문과 그룹이 존경받는 또 하나의 이유다. 발렌베리 그룹이 거느리고 있는 100여개의 회사명에는 발렌베리라는 이름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회사는 그룹이 소유하고 있지만 경영은 전문경영인이 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같은 전문경영인 체제를 통해 발렌베리 그룹 산하 기업들은 분식회계나 오너 친인척들의 독단적 경영에서 자유로울 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건전한 기업 경영을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