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차지 않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어 기쁘고 넉넉하고 푸근함, 또는 그런 상태’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행복의 중요한 비밀을 알아차릴 수 있다. 행복을 행복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 곧 내 마음의 소리가 행복의 기준이요, 행복 그 자체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톨스토이의 명작 ‘안나카레리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사실 자신의 인생이나 삶은 물론, 가정이나 회사의 운명도 수없는 생각과 습관을 선택한 결과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결핍감은 ‘영원한 불만’ 상태에 떨어지게 된다. 이처럼 행복이란 그것을 구하면 구할수록 우리의 손으로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나가 멀어져 간다.
그래서 ‘주홍글씨’를 쓴 나타니엘 호손은 “행복은 나비와 같다. 쫓아다닐 때는 붙잡을 수 없지만 조용히 앉아 있으면 당신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라고 했다. 행복이란 손쉽게 성취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찾아내고 잠시 즐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행복도는 ‘자신이 가진 것÷자신이 갖고 싶은 것’으로 산정할 수 있다. 따라서 ‘가진 것’이 아무리 커도 ‘갖고 싶은 것’이 더 크면 그 사람은 불행하다. 지나친 비교의식은 ‘갖고 싶은 것’을 불리면서 행복도를 줄여버린다. 하지만 ‘가진 것’이 좀 적더라도 ‘갖고 싶은 것’이 적당한 수준이라면 그 사람은 행복할 수도 있다. 따라서 각자의 노력과 좋은 방법을 통해 ‘가진 것’을 늘리는 노력이 이뤄지는 동시에 ‘갖고 싶은 것’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우리 사회의 행복도는 개선될 것이다.
따지고 보면 행복은 삶의 최종 이유도 목적도 아니다. 행복연구가 연세대 서은국 교수는 ‘행복의 기원’에서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은 한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모든 쾌락은 곧 소멸되기 때문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절대적이다.
우리 국민은 지금 너나없이 행복에 배고프다. 우리가 과거 헝그리 정신으로 경제 도약을 이뤘듯이 이제 ‘행복 헝그리’ 정신으로 행복 도약을 이뤄야 한다. 안전벨트를 맨다고 사고 확률이 줄어들지 않지만 사고가 났을 때 적게 다치거나 안 다칠 수 있다. 저성장 시대를 맞아 불행을 줄이고 행복도를 높이기 위한 사회심리적 안전벨트가 절실한 상황이다.
‘행복해지는 법(How to be happy)’의 저자 쇼냐 류보머스키는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들을 과학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정리해 주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행복이란 환경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은 환경적 요인은 10% 정도밖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50%는 타고난 성품이나 체력 같은 유전적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나머지 40%는 자신의 노력으로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을 위한 인생을 드라이브하는 자신은 스스로가 운전수이자 책임자다. 행복에 대한 헝그리 정신을 가지려면 맷집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맷집은 어려움이나 스트레스를 견뎌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복원력의 힘인 ‘회복 탄력성’이 필요하다. 즉 권력이나 명예도, 또 실패와 치욕, 가난과 증오도 모두 우리 곁에 잠시 머물다 갈 뿐이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 너무 즐거워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고난과 고통이 있다고 하여도, 희망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절망의 돌산에서 희망의 반석을 캐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고난과 절망이 가로막고 있다면 이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