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흑해 막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곡물 탈취 본격화

입력 2023-09-0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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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러시아 관보·회의록 확인 결과
지난주 농산물 철도운송 지원 확대 결정
5월 점령지 4곳 철도 인프라 통합 법인 신설
유엔 식량안보 패널 “장기적 계획으로 추정”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에서 지난해 6월 21일 농부가 밀을 살피고 있다. 도네츠크(우크라이나)/AP뉴시스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에서 지난해 6월 21일 농부가 밀을 살피고 있다. 도네츠크(우크라이나)/AP뉴시스
흑해 항구를 막아서며 세계 식량 공급 문제를 촉발한 러시아가 유럽 최대 곡창지대 우크라이나의 곡물을 본격적으로 탈취할 움직임을 보인다. 우크라이나 점령지 내 철도 인프라를 강화한 데 이어 농산물의 철도 운송에 대한 보조금을 확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4일 본지가 러시아 정부 관보와 회의록을 확인한 결과 지난주 당국은 보조금 규칙 개정을 통해 농산물에 관한 철도 운송 지원을 확대하기로 했다.

미하일 미슈스틴 러시아 총리가 최종 서명한 개정안엔 우선 광물질비료 운송과 관련한 국가 지원 확대 약속이 담겼다. 극동 지역의 모든 농가에 특별 혜택을 적용, 철도를 통해 광물질비료를 조달할 때 비용을 일부 줄여주기로 했다. 광물질비료란 생물이 아닌 광물에서 공업적으로 만들어진 비료로, 질산칼륨 등이 포함된다.

둘째로는 곡물 운송 지원 대상을 극동에 국한하지 않고 중앙과 북서 지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여기엔 제분소와 호밀 농가 등도 포함됐다.

미슈스틴 총리는 안건 승인을 위해 개최한 회의에서 “정부는 농산물을 철도로 운송하는 것을 더 쉽게 하도록 현행 규정을 조정하는 중”이라며 “이번 조치는 농업 생산자와 운송업자 모두에게 필요하고, 이들이 우리 시민들에게 필요한 식량을 공급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러시아 인부들이 지난해 10월 8일 부서진 크림대교 철도교량을 고치고 있다. 크림반도(우크라이나)/AP뉴시스
▲러시아 인부들이 지난해 10월 8일 부서진 크림대교 철도교량을 고치고 있다. 크림반도(우크라이나)/AP뉴시스
특히 개정안엔 농가 비용 감축에 따른 크림철도의 손실을 정부 예산으로 보전하겠다는 약속이 담겨 눈에 띈다. 크림철도는 러시아 정부가 연방철도와 별개로 운영 중인 사업체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했던 2014년 세워졌다. 그간 러시아 본토와 크림반도 사이에서 여객과 화물을 옮기는 역할을 도맡았다.

그러나 전쟁 후 유럽연합(EU)이 관련 기업과 개인에게 제재를 가했고, 최근엔 우크라이나의 반격으로 크림대교 철도교량 일부가 파괴되면서 러시아는 크림철도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6월 유럽 철도 전문지 레일웨이서플라이는 러시아 보험회사들이 사업 불확실성을 이유로 점령지행 열차의 보험 가입을 막고 있으며 열차 소유주들 역시 정부 사업에 회의적인 반응이라고 보도했다. 당국이 피해 농가를 도우려는 것도 서비스 수요를 늘리고 철도 사업을 활성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번 개정안 외에도 러시아 정부는 올해 들어 철도 사업을 강화하고 지원책을 내걸고 있다. 올해 곡물과 채소 등의 철도 운송에 할당된 예산은 60억 루블(약 823억 원)이 넘는다. 5월 ‘노보로시야 철도’라는 법인을 세운 것도 이와 관련 깊다. 이 법인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자포리자, 헤르손 등 전쟁 후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 네 곳의 철도 인프라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해 점령지에 물류망을 구축하고 열차를 늘리고 운송 프로세스를 관리하겠다는 게 당국의 입장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9년 12월 23일 열차를 타고 크림대교를 건너고 있다. 크림반도(우크라이나)/AP뉴시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9년 12월 23일 열차를 타고 크림대교를 건너고 있다. 크림반도(우크라이나)/AP뉴시스
전쟁 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곡물을 국내외로 반출하고 있다는 건 이미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은 지난해 파키스탄과 스리랑카, 북부·동부 아프리카 국가들에 러시아가 약탈한 곡물을 싼값에 사려는 행위를 멈출 것을 경고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점령지에 철로를 깔고 농산물 운송을 지원하려는 러시아 정부의 움직임은 세계 식량 가격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 곡물을 자국으로 조달하려는 러시아의 큰 그림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엔 식량안보 및 영양 전문가 고위급 패널(HLPE-FSN) 운영위원인 윌리엄 모슬리 맥칼리스터대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해당 지역들은 역사적으로 곡물, 특히 밀이 풍부하게 생산되던 곳”이라며 “현재 그곳에 수확해야 하거나 저장된 곡물이 남아있는지 알기 어렵지만, 이번 움직임은 러시아의 장기적인 계획에 가까울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세계 식량 공급에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내다봤다. 모슬리 교수는 “이번과 같은 새로운 전략은 일부에만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볼 때 국제사회는 일부 빵 바구니에 의존하기보다 분산된 식량·곡물 생산 전략을 세우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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