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뒤 개선…과실 인정하는 것?
모든 제도가 사후 개선으로 발전
늦게라도 오류 고치는 게 ‘정도’
사고 발생 예견 힘든데
사후 관점서 ‘과실’ 몰아
안전문제 심각해질 수도
기업의 징계 규정에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오래된 회사들은 징계사유를 수십여 개 나열하는 경우가 있다. 정확한 징계사유 규정이 없어 비위행위를 징계하지 못했던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비판도 있겠지만, 모든 실무나 제도는 소를 잃을 때마다 외양간을 조금씩 고치면서 발전해 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법률 세계에서 특히 소송에서는 약간 다른 관점의 질문이 제기된다. 즉 “소를 잃고 나서 외양간을 고쳤다는 사실은 외양간에 하자가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소송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따로 법령이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가스유출 사고가 발생한 이후 가스회사에서 자발적으로 부취제를 넣기 시작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부취제를 넣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과실’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징계사유의 경우에도 과거 규정상 징계사유가 모호하여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회사가 규정을 조금 더 분명하게 개정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기존 징계규정의 허점을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는지 걱정하게 된다.
소송 상대방이라면 당연히 국가나 기업의 개선조치가 기존 업무 수행의 하자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사실일 수 있다. 적어도 그러한 개선조치가 가능했다는 점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하급심 판결은 납품업자가 기존 제품의 하자를 발견한 후 재발방지를 위해 개선방안을 마련‧시행한 사안에서, 이러한 조치는 ‘그 이전에는 상당한 주의를 다하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판단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개선조치를 취하는 국가나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런 관점이 부당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첫째, 어떠한 조치가 가능하다고 해서 반드시 의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모든 문제의 가능성을 미리 예상할 수는 없는데, 사후적인 관점에서 가능하다고 해서 과거에도 이를 예상할 수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 때가 있다.
둘째, 반드시 개선조치를 하자나 과실의 증거로 삼아야만 할 현실적인 필요도 별로 없다. 종래의 업무에 하자나 과실이 있었는지는 그 행위 당시의 사정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고,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 이후의 개선조치를 언급하는 것은 단지 판단이나 이유 설명을 편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이기도 한다.
셋째, 정책적인 면에서는 기존의 문제에 대해 개선방안을 추진한다고 해서 과실을 인정한다면, 앞으로 소송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아무런 개선 방안을 추진하지 않게 될 우려가 있다. 이는 특히 안전과 관련해서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적용범위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미국연방증거규칙은 과거의 어떠한 사고로 인해 발생했던 부상이나 피해와 관련하여 앞으로 그러한 부상이나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경우, 그러한 ‘사후구제조치’는 행위의 과실이나 제품의 하자 등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 법적 책임에 관한 분쟁이 개선조치 자체를 막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한 정책적 규정이다.
한국에서 미국과 같은 증거 규칙을 두는 것은 당장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우리 법은 법관의 ‘자유심증’을 원칙으로 삼아 특히 민사소송에서는 증거능력(자격)에 대한 세세한 규정을 거의 두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적어도 법원에서 섣불리 사후적 관점만을 들어 개선조치가 곧 과실의 증거라고 판단하는 일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